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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곡실기 서평] 창피하고 부끄러운 이야기 ' 의병장 도곡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김진배 전 국회의원, 현대사연구

먼저 머리 숙여 도곡 이유 선생의 영전에 사죄 합니다. 다음 우리 부안 , 그 가운데에서도 상서와 보안, 하서 분들에게 창피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아는 체 하고 살아오고 잘난 체 하며 지내온 제가 이토록 백 사람 천 사람 앞에 공개적으로 사죄하며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며칠 전에 어떤 분으로부터 책 한 권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저를 잘 안다 는데 저는 그분이 누구인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책 이름은 한문으로 도곡실기 桃谷實記 고 출판사는 부안인터넷신문사로 되어있었습니다. 편자나 역주자의 이름도 나로서는 생소했습니다. 하지만 돈 주고 산 책은 물론 거저 받은 책도 일단은 바로 대충 펼쳐보는 것이 오랜 습관이 된 탓인지 책을 펼쳤습니다.

우선 맨 앞 쪽에 있는 화보가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아무개 아무개의 묘다, 하는 묘와 상석 비석은 요즈음 더러 볼 수 있는 그런 묘소여서 그저 지나쳤습니다. 바로 그 사진 아래에 아무개 유허비 사진이 실려있는데 이런 유허비는 흔하지는 않지요. 책 장을 다시 넘겼을 때 또 한 장의 사진을 보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타루비 墮淚碑!

타루비는 제가 수무 번도 넘게 가서 분향을 하거나 절을 올린 곳입니다. 더구나 타루비의 비문을 누가 짓고 그 글씨를 누가 썼든 간에 보안과 상서의 경계 고개 마루 오른쪽 옴푹한 이곳 ‘유정자 재’ 유진치 留陣峙 호벌치 胡伐峙 에 모신 임진왜란-정유재란의 성지를 참배 했는데도 정작 이 타루비와 타루비의 주인공의 한 사람인 도곡 이유 桃谷 李瑜 선생과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는 전혀 모르고 지냈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 입니까.

이 성지를 조성하고 비를 세우는데 부안군 당국이나 부안군의 여러 뜻있는 분들의 정성을 모아 이를 추진한 백주 김태수 白洲 金泰秀 선생을 찾아 뵈었습니다. 1981년 4월 백주 선생은 변산문화협회 회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향토 문화에 온 정성을 다 하시던 때 였습니다. 이분은 제 친구 김석성 金石星 작고, 전 부안여중고 이사장 군의 부친이어서 저를 당신 자식처럼 대해주셨습니다.

국회의원이 되었다고 인사차 들렸는데 이 어른은 “진배 차 있지? 나하고 꼭 가볼 데가 있어, 어때요” 하시며 호벌치 전적비가 있는 유정자를 갔으면 하는 말씀이었다. 나는 난감했다. 부안에서도 따로 인사를 간 어른은 겨우 두 세분인데 이 어른의 간절한 청, 그것도 “이제 자네쯤 되면 이런 걸 잘 챙겨야 되네”하는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지 못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서울 길을 재촉했습니다. ‘서해안고속’이 뚫리기 전이니 ‘새마을’로도 기차로 댓시간 남짓이 걸리던 때 입니다.

정작 어른을 모시고 전적비 참배를 한 것은 그로부터 아마 댓달 뒤 귀향보고를 하러 내려온 추석 무렵이었습니다. 그나마 서울 동작동에 있는 현충원 참배보다는 먼저였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해야 할 일은 당장에 해야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이제사 깨닫게 되었으니 이런 바보 짓이 어디 있을까요. 그로부터 41년 동안을!

더욱 부끄러운 것은 이 유 선생의 유택과 위허비가 내가 일곱 살 때부터 그 마을 이름을 알던 ‘동화실’ 상서면 통정리 도화동 뒷 산에 있다고 그 책에 씌여 있었던 것을 얼마 전에야 알았습니다.

제가 난생 처음 기와로 지붕을 덮고 커다란 유리창으로 밖을 환하게 내다볼 수 있는 엄청나게 큰 집, 상서초등학교 1941년 그때는 그 마을 이름을 딴 ‘동화실핵교’였습니다. ‘동화실’은 내가 난 동네 ‘뇌기동’과는 딴 판이었다.

서쪽으로 시오리 산중 갯가 동네 집들이 거의 찌들어가는 우중충한 집들이었던데 비해 이 고라실 마을의 집들은 같은 초가집이면서도 높고 큼직하며 무엇보다도 우중충한 그런 집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상서 학교에 입학한 아이가 단 셋인데 비해 이 동화실에선 네명 바로 옆 동네 구암리 까지 하면 여덟이었습니다. 그것도 이 두 마을에서 우리와 같이 입학한 꼬마가 백씨 성만 다섯이었으니 백씨의 위세를 짐작할 만하지요.

우리는 일제 강점하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우연하게도 우리 1학년 2반 담임은 ‘무라야마’라는 여선생이었습니다. 우리가 2학년에 올라가서도 2반 담임은 역시 ‘구로끼’라는 일본 선생이었습니다. 모두 결혼 전이어서 여선생은 백씨네 집에서 자취를 했고 남자 선생은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든 이 마을은 내가 난 마을 못지않게 어쩌면 어릴 적의 로망이었습니다.

나는 ‘도곡실기’라는 책을 준 분에게 그가 준 책 앞에 볼펜으로 쓴 핸드폰 번호를 돌려 도화동에 가서 임진-정유재란의 의사, 무명의 장군 묘를 참배 하고 싶다는 뜻을 전 했습니다.

-언제요?

“지금 바로요. 선생님 차로 좀 데려다 주셨으면 하는데...”

-바로 가실 수 있겠어요?

“그럼요, 그런데 제가 선생님 얼굴을 똑바로 잘 모르는데 저희 아파트에 잠간 들리시겠어요? 한 30분 뒤든 한 시간 뒤든, 집에서 기다리지요”

어디서 날라왔는지 나를 안내할 분이 금방 올라 오셨습니다. 그때사 이 분이 부안인터넷신문의 조봉오 사장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고 옛 시인들은 말했습니다. 거의 80년 만에 들려본 도화동 뒷산은 민둥산이 아니라 소나무와 잡목들이 가득 차 수 백명의 어린 초등학교 아이들이 겨울이면 토끼 몰이를 하던 그 휑하던 모습은 간 데 없었습니다. 인걸은 고사하고 집안이고 논밭 두럭이고 맑은 낮 오후인데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안 읍내 서쪽에서는 가장 큰 부자였다는 백 아무개의 제법 긴 벽돌담을 끼고 남쪽 산 쪽으로 한참 올라가다 보면 오른 쪽으로 마을 모정이 보이고 거기에서 조금 꺾어 동남쪽에 도곡 선생의 재실과 유허비가 보였습니다. 길바닥은 세멘으로 잘 포장 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한 10분 오솔길을 걸어 올라가자 도곡 선생의 유택에 이르렀습니다. 저를 안내한 조 사장은 제가 든 종이 컵에 ‘처음처럼’ 소주를 따라 상석위에 놓도록 한 뒤 참배를 하도록 하셨습니다. 저는 엉겁결에 무릎을 꿇고 재배를 했습니다.

몇 년 전부턴가 허리도 전과 같지 않은데다 앉았다 일어서는 것이 불편하여 우리 조상 성묘하는데도 그저 묵념으로 대신해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엉겁결’에 무릎 꿇고 참배하게 됐는지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견하지요, 정으로야 혈육의 정이 크겠지요, 하지만 이 나라가, 아니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수 백년 이어온 데는 목숨을 초개같이 던진 도곡 이유 桃谷 李瑜 선생 같은 맨주먹으로라도 이 나라, 내 고장을 쳐들어온 왜적을 그냥 둘 수 없다는 불타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부안김씨인 도곡 선생의 부인은 남편이 순절했다는 소식을 들고 그 험한 유정자의 전쟁터로 달려가 적에게 대들다가 목숨을 나라에 바쳤습니다.

16세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 전쟁 속에 국토는 잿더미가 되고 수 많은 병사들은 왜적의 소총에 혼비백산하여 참패를 거듭했습니다. 그때 분명히 조선朝鮮이라는 나라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임금은 적이 도성 2백리 밖 충주성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듣자 부랴부랴 북쪽으로 도망갔습니다.

왜적들은 황해도 평안도 한쪽은 물론 거의 버려지다 시피한 함경도 끝까지 온 국토를 분탕질을 쳤습니다. 백성들은 농사를 팽개친 채 산속으로 숨었습니다. 총 맞아 죽은 사람 보다 굶어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합니다. 왜놈들(지금은 점잖게 일본사람)이 처음 부산을 거쳐 동래 진주로 쳐들어올 때 그들은 목표가 도성(한성-지금 서울) 이어서 전라도 쪽은 평온했습니다.

그런데 4년 뒤 이른바 정유재란으로 왜군이 다시 쳐들어옵니다. 그때는 아예 전라도 어느 바닷가 어느 골짜기 할 것 없이 거의 휩쓸었습니다. 왜군은 이번에는 남해안을 통해 침입, 전주 남원을 박살 내고 마침내 변산의 동쪽 줄포만과 서쪽 동진강으로 쳐들어와 노략질을 했습니다.

부안현의 치소가 허술하기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였지요, 나라의 녹을 먹고 국방과 치안의 임무를 띈 사람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대처했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창피하기 이를 데 없는 나라요, 국왕이오, 현감이었습니다. 그 밑에 아전들이야 더 말할 것이 없지요. 이런 속에서 분연히 일어선 이유 선생 부부의 장렬한 전사는 예사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호벌치 전적지의 영웅들은 이 두 분만은 아닙니다.

흥덕 남당리에서 창의하여 호벌치에서 전사한 채홍국 蔡弘國 선생 등 그 자랑스런 146명의 이름들은 찬연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호벌치의 전사들은 대부분 40대의 농군이자 선비들이었으며 예외 없이 적과 대적하여 싸워야 할 의무가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무기를 가지고 싸워야 할 사람은 도망가고 글이나 읽고 농사일이나 하던 사람들이 의분 하나로 목숨을 불살랐으니 어찌 장하다 아니 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는 그랬다 치더라도 이러한 의로운 영웅들에 대한 현창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봅시다. 일본이 침략한 임진 정유 ‘7년전쟁’과 청나라가 쳐들어온 병자호란에도 불구하고 조선이라는 나라는 존속 되었습니다.

하지만 왕실이나 높은 벼슬을 한 사람들의 행적은 거창하게 내세우면서도 정작 무명 용사들의 행적은 그 집안에서 마자 묻히고 말기가 예사였습니다. 호국의 영웅들이 잠든 300여 년 뒤인 1965년 8월 호벌치 (유진치,유정자고개) 전적비를 세우게 됩니다.

그것도 유림과 유족이 세운 것입니다. 신위를 모실 사당도 부안의 유림들이 세웠습니다. 왜 하필 유림일까, 저는 궁금했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선비이자 철저한 배일주의자인 艮齋 田愚 선생의 문인들이 앞장섰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도화동에 있는 도곡 선생 사당 경의재 敬義齋 도 도곡 선생의 관향인 함평이씨 咸平李氏 후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세웠다 합니다. 눈뜬 사람만이 조상도 알고 조국도 아는구나! 의로운 피가 끓고 가루가 되어도 흩어지지 않을 뼈를 가진 사람만이 역사를 보존하겠구나!

순 한문으로 된 ‘도곡 선생 실기’를 누구나 알기 쉽게 한글로 풀어서 주석 까지 꼼꼼하게 부쳐 책을 내게 한 사람도 부안사람입니다.

자기 조상의 위업을 내세우는 데 그치지 않고 나라나 이 지방의 문화기관이나 단체가 해야 할 일을 그 분들이 한 것이 새삼 대견하게 보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여야 보배라고 하지요. 제가 다닌 초등학교가 있는 도화동에 도곡 이유 선생 같은 정유재란의 무명용사가 계셨다는 것을 일깨워준 부안인터넷신문의 조봉오 선생께 이런 지면을 빌어 감사를 드립니다.

김진배 전 국회의원(2022년 5월 경의재 앞에서)
김진배 전 국회의원(2022년 5월 도곡 묘소에서)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타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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