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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현, 1728년 무신년 역적 사건(오류와 진실 1)부안 변산은 "邊山賊/邊山群盜" 절대 아니다

부안은 어염시초魚鹽柴草가 풍부하여 인심이 좋아 생거부안이라는 명성을 듣고 있다. 

자연 환경은 아름다운 변산반도와 환상의 섬 위도, 곰소 천일염, 곰소젓갈, 칠산어장 조기, 풀치 등 맛있는 음식이 넘쳐나는 곳이다.

항간에서는 불분명한 역사적 기록으로 부안 변산을 욕되게 하고 있다. 1728년 무신란(이인좌의 난) 당시 변산적邊山賊 수천명이 참가했다는 정확하지 않은 기록을 공공연히 출판하고 있다.

최근 학계에서는 위와 같은 사실이 근거 없음을 주장하는 논문을 잇달아 발표하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전주대 문경득 교수의 2016년 논문 ‘영조대 戊申亂 관련 邊山賊의 성격’에서는 “ 변산 도적의 지도자로 알려진 鄭八龍에 대한 진술들도 변산 도적과 관련이 없었으며, 정팔룡은 경상도의 정희량이나 경기도의 정세윤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변산의 도적은 실재했으나, 무신란과는 관련이 없었다”라고 발표했다.

이는 변산에 정팔용이 청룡대장으로 8000명 가량의 부하들이 있었다는 주장과 변산적이 무신란에 가담했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논문으로 주목해야 한다.

고수연 교수의 2015년 논문 ‘조선 英祖代 戊申亂의 실패 원인’에서는 “호남지역의 邊山賊은 그 소문만으로도 반란군과 백성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변산적과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 되어 오던 정세윤鄭世胤은 반란 직전 호남에서 청주로 떠났고, 金守宗 역시 끝내 변산적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결국 변산적이 빠진 호남군은 3월 14일 평교모임과 박필현朴弼顯의 3월 21일 전주성 점령 모두 실패한다”라고 주장했다.

변주승, 문경득 교수의 2013년 논문 ‘18세기 전라도 지역 무신란(戊申亂)의 전개과정 -「무신역옥추안(戊申逆獄推案)」을 중심으로-’에서는 “무신란 당시의 ‘변산적’이 하층민으로 구성된 변산의 도적 무리라는 기존 견해와 달리, ‘변산의 역적 무리’임을 밝혔다”라며 수십에 불과한 역적 무리였다는 새로운 주장을 내놨다.

변산적이 떼도둑이 아니고 소수의 역적 무리임을 밝혀낸 것으로, 무신란 당시 변산에 수백~수천명의 반역 무리들이 있었던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문경득 교수는계속해서 이와 관련된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특히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소개된 허생전에는 ‘是時邊山群盜數千’ 변산에 수천의 군도(떼도둑)이 우글거리고 있다는 몹쓸 단어가 나온다. 이와같은 내용을 픽션으로 만든 것이 2014년 영화 하정우 주연의 군도(민란의 시대)이다.

노론 명문가인 박지원은 같은 반남박씨 종인이며 할아버지뻘인 박필현(태인현감)의 무신년 역적사건을 허생전으로 미화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부 기록에서는 연암 박지원의 조부가 박필현이라고 주장하지만, 연암 박지원 조부 초명이 박필현朴弼이며 성년 이름은 박필균朴弼均이다. 정작 무신란을 일으킨 주역은 박필현朴弼이다. 반남박씨 일부에서는 1728년 사건을 무신혁명으로 부르고 있다.

부안 변산은 떼도둑(군도群盜)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인심이 좋은 생거부안만 존재했었다.

한편, 영조3년 10월 20일 좌의정 조태억은 변산 도적떼가 심각하다며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부안의 도적떼가 양민(良民)을 찾아 모아 도적 무리를 채우는 것이 마치 각 읍에서 군정(軍丁)을 징발하는 것과 똑같다고 하니, 듣고서 매우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 막 비국 낭청(備局郎廳)을 파견하여 변산의 일을 적간(摘奸)하여 자세히 염탐해 오려고 하는데, 근년에 남쪽 지방에 흉년이 들어 인심이 뿔뿔이 흩어져서 사람들은 실로 그것을 깊이 염려하고 있습니다. 도적떼가 이와 같이 횡행하고 전주 영장 전순원이 과연 대간(臺諫)의 말대로 도적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면, 지금 우선 체차한 다음 후임을 각별히 골라 보내도록 병조에 분부하소서. 수령은, 이렇게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어 진휼(賑恤)하는 것이 다급한 때에 교체하는 것은 폐해가 되고 듣는 사람들이 놀라기 쉬우니 가볍게 논의할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먼저 해당 도의 감영에 비밀리에 관문(關文)을 보내 허실(虛實)을 자세히 염탐하여 형편을 알아낸 다음에 처리해도 늦지 않을 듯합니다.”

이에 대해 동부승지 이중관은 "부안(扶安)과 고부(古阜)는 도적으로 인한 근심이 별로 없고, 정읍(井邑), 장성(長城), 무장(茂長)이 심각하다"며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신이 영광(靈光)에서 올라오다가 8월 4일에 변산(邊山)을 지나면서 들으니, ‘흥덕(興德)과 무장(茂長) 사이에 굽은 재가 있습니다. 이는 변산의 한 산기슭으로 재 아래에는 20리가 되는 긴 골짜기가 있는데, 작년부터 도적떼가 골짜기 안에 둥지를 틀고 들어앉아서 큰길을 막아 끊으니 길손들은 대부분 작은 길을 따라 길을 다니다가 추수 이후에야 큰길로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도적은 근본이 강성(强盛)하여 참으로 작은 근심이 아닙니다. 변산에는 골짜기가 많아 골짜기마다 도적이 있으나, 부안(扶安)과 고부(古阜)는 도적으로 인한 근심이 별로 없고, 정읍(井邑), 장성(長城), 무장(茂長) 등은 도적으로 인한 근심이 매우 참혹합니다. 나주 영장(羅州營將) 전일상은 올해 27살로 용기와 기운이 남들보다 뛰어납니다. 그가 전립(戰笠)을 착용하고 직접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 도적의 실정을 탐지하자, 도적들은 전일상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일시에 사방에서 모여들었습니다. 전일상은 죽을 뻔하였다가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전일상의 일은 실로 가상한데, 전주 영장(全州營將) 전순원이 도적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도 들었습니다. 지금 전순원을 체차한 다음 후임을 특별히 골라 보내고, 변산 근처 읍의 수령을 한꺼번에 개차하기는 어렵더라도 이것도 자리가 비는 대로 무신으로 차임해 보낸다면, 도적을 다스리는 방도로 볼 때 나을 듯합니다.”

디지털부안문화대전에서도 변산 도적이라는 항목에 대하여 "1728년 무신란 당시 변산적들이 가담한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누구를 위한 부안문화대전인지 답답한 실정이다.

출처:승정원일기 영조 3년 10월 20일
출처:네이버 영화

<참고문헌>

전라도지역 무신란(戊申亂) 연구(전개과정을 중심으로), 문경득, 2013년

18세기 전라도 지역 무신란(戊申亂)의 전개과정 -「무신역옥추안(戊申逆獄推案)」을 중심으로, 변주승, 문경득, 2013년

‘영조대 戊申亂 관련 邊山賊의 성격’, 문경득, 2016년

전라도 지역 무신란 연구, 문경득, 2017년

‘조선 英祖代 戊申亂의 실패 원인’, 고수연, 2015년

영조4년 戊申亂과 전라도 의병-『湖南節義錄』분석을 중심으로, 2010년, 유한선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번역 및 역주, 변주승, 2004년, 한국연구재단

부안군지1권(2015년)

 

 

 

조봉오 기자  ibuan11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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