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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현, 1728년 무신년 역적사건(오류와 진실 3)하서 고응량은 무신년 피해자, 아니면...

디지털부안문화대전의 무신란戊申亂(=이인좌의난) 개설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신란(戊申亂)은 1728년(영조 4) 3월 15일~3월 24일에 소론(少論) 준론(峻論)과 남인(南人) 사족(士族) 등이 연합하여 일으킨 반란 사건이다. 영조의 폐위와 소현 세자(昭顯世子) 증손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의 왕위 추대를 위해 일으킨 반란 사건이며, 당시 전라도 부안의 사족과 변산적 등도 가담하였다.”

이어 무신란 경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728년 3월 15일에 이인좌(李麟佐)가 호서(湖西)인 청주에서 거병했고, 이에 호응하여 3월 20일에 영남의 안의(安義)와 거창, 호남의 태인에서도 거병하였다. 청주를 함락한 이인좌는 영남과 호남의 군사를 모아 서울로 진격하고자 하였다. 태인에서 거병한 박필현(朴弼顯)은 호남의 여러 사족과 접촉했고, 부안의 사족 고응량, 성득하(정세윤 사촌), 고효점, 성상하, 진사 김수종, 박창한, 김창수, 파총 임진량 등 10명도 고부 평교 모임에 가담하기로 하였다. 박필현은 부안 사족이 가담한 평교 세력 및 진주목 신후삼(愼後三)의 군대와 합세한 후, 태인의 군사까지 징발하여 전주성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고부 평교에 합세하기로 한 부안 사족 등이 참여하지 않았고, 무장에서 일어난 박필몽(朴弼夢)의 세력과도 연합하지 못하게 되었다. 전주성에서 내응하기로 한 정사효와의 연대에도 실패하면서 호남 세력은 와해되었다.”

위와 같이 디지털부안문화대전의 무신란 설명에서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의구심은 1)변산적邊山賊이 가담했다는 주장이 없다. 2)부안 사람들 누가 주도적으로 가담했는지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3)디지털부안문화대전의 설명조차 고부 평교에 합세하기로 한 부안 사족 등이 참여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1728년 무신란 사건에서 부안이 어떤 역할을 했었는지 정확히 밝혀야 한다. 

특히 디지털부안문화대전 무신란 경과/결과에서 고응량의 가담 정도를 구체적이지 적시하지 않고 있으며, 변산적邊山賊에 대한 활동 내용도 없어서 1728년 무신란 당시 부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는 맹점을 갖고 있다. 

고응량의 최후 진술(결안)에서 '1728년 2월 초 성득하 아우 성상하가 저를 찾아와 묻기를 '장차 영남지역에서 큰일을 꾸미려 한다' 하기에 불길하다는 내용의 답변을 제가 보냈는데. 이틀이 지난 뒤에 성상하가 자기 패거리들과 함께 와서 저를 꽁꽁 묶고 마구 때리며 묻더니, 자기들과 같이 고부로 가서 군사를 모으자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그들을 따라 고부의 노교와 평교 사이로 갔습니다"라며 고응량은 강제로 끌려 갔음을 최종 진술했다.

부안군지1권 449p에는 "영조실록에 의하면 무신란의 역적은 642명 이라고 밝히고 있어 그 규모가 자못 컸음을 알 수 있다. 조정에서는 무신란의 10역적을 김일경, 목호룡, 이인좌, 이웅보, 박필현, 이사성, 정희량, 박필몽, 남태징, 민관효로 결정하였다."라고 규정하고 있어서 고응량이 무신란 10역적에 포함되지 않았음이 확실해졌다.

문경득 교수 논문(전라도 지역 무신란戊申亂연구, 2017년)에는 고응량이 몰수당한 재산(노비)은 다음과 같다. 고응량 재산은 전체 2위를 하고 있어서 굳이 역적이 되는 상황을 감수했겠는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 수 있는 충분한 여지가 있다.

"고응량의 적몰(籍沒) 된 가산만 계산하면 밭이 35결(結) 93부(負) 4속(束), 논이 1결 77부 5속, 노비가 49구(口)였다. 논의 양은 적지만, 밭의 규모는 전체 적몰 가산 중 2위이고, 노비의 양은 전체 몰수 노비 중 1위였다."

무신란 당시 고응량이 몰수 당한 재산은 1873년(고종 10년) 문중 고진호씨에 의해 충훈부(공신 관리 기관)로부터 재발급 받은 사패지 완문으로 인해 석불산 등을 되찼았다고 한다.(문중 관계자 증언)

고응량이 청주까지 원정을 갔다는 이야기는 원만주(추안급국안 45권, 341쪽. 영조 4년 5월 24일 원만주) 자백 외에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이에 대한 구체적 연구가 필요하다. 만약 원만주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면 고응량은 주변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고응량을 심문할 때마다 매번 30대씩 때렸다는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자료를 통해 당시 진술이 얼마나 신빙성 있을지도 감안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1728년 무신란 당시 부안현에는 진압군이 오지 않았을 정도로 사안이 미미했다. 일부 기고자들의 변산적 1만명 이야기가 합당한 상황이었다면 당연히 진압군이 부안현에 와야 한다.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 경기도에서 발생한 무신란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진압군이 출동했다.

부족한 진압군을 해결한 것이 의병이었다.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기록된 전라도 의병 무신의적戊申義蹟 99명과 이들이 동원한 의병은 상당히 많았지만, 무신의적 99명에 부안현 사람이 1명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면 부안은 평온했던 것으로 봐야 한다.

전라도 무신의적 99명에는 고창 무장현 4명(金再輝,金益礪,孫益道,金尙華)이 포함되어 있다. 金再輝은 진안 죽도에 숨어있던 박필몽을 생포한 공로를 인정받아 茂長 守城將 관직을 받았다.

이제 무신란 적극 가담자로 판정 받아 6월 21일 군기시軍器寺 앞길에서 부대시不待時로 능지처사陵遲處死 당한 고응량에 대한 제대로 된 사실 규명이 필요하다.

문경득, 2017년, 전라도 지역 무신란 연구
추안급국안 제15권, 전주대 변주승, 문경득
추안급국안 제15권, 전주대 변주승
추안급국안 제15권, 전주대 변주승,
영조4년 戊申亂과 전라도 의병-『湖南節義錄』분석을 중심으로, 2010년, 유한선 
영조4년 戊申亂과 전라도 의병-『湖南節義錄』분석을 중심으로, 2010년, 유한선 

<참고문헌>

전라도지역 무신란(戊申亂) 연구(전개과정을 중심으로), 문경득, 2013년

18세기 전라도 지역 무신란(戊申亂)의 전개과정 -「무신역옥추안(戊申逆獄推案)」을 중심으로, 변주승, 문경득, 2013년

‘영조대 戊申亂 관련 邊山賊의 성격’, 문경득, 2016년

전라도 지역 무신란 연구, 문경득, 2017년

‘조선 英祖代 戊申亂의 실패 원인’, 고수연, 2015년

영조4년 戊申亂과 전라도 의병-『湖南節義錄』분석을 중심으로, 2010년, 유한선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번역 및 역주, 변주승, 2004년, 한국연구재단

부안군지1권(2015년)

 

 

 

 

 

조봉오 기자  ibuan11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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