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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기' 4권 제 1장 서해훼리호 참사 9주기 위령제 1

서주원 장편소설 '봉기' 4권
제 1장 서해훼리호 참사 9주기 위령제 <1>

1993년 발생한 서해훼리호 침몰사고로 292명이 하늘 가는 길에 올랐다. 이듬해인 1994년, 위도에서는 서해훼리호 참사 1주기 위령제를 포함한 두 차례의 위령제가 열렸다.

1931년 위도 근해 칠산바다에서는 대규모 참사가 발생했다. 어선 침몰사고로 목숨을 잃은 어부는 600여 명이었다. 그해 칠산바다엔 세 차례의 큰바람이 몰아쳤다. 전복된 어선은 500여 척이었다. 위도면 딴치도리엔 익사한 어부들의 명복을 빌고 안전 조업을 소망하기 위한 비석이 세워졌다. ‘조난어업자조령기념비’다.

위도 주민들은 매년 5월 이 기념비 앞에서 위령제를 지냈다. 규모는 작았다.

서해훼리호 참사 약 7개월 뒤인 1994년 5월 4일, 이 기념비 앞에서 치러진 위령제엔 위도 주민 3백여 명이 모였다. 예년처럼 규모는 간소했지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서해해훼리호 참사 직후여서 희생자 292명의 영령을 추모하는 의식도 추가됐다.

그날 위도에서는 이색적인 풍어제도 열렸다. 면사무소 소재지인 진리 포구에서 열린 위도 주민들의 힘찬 재기를 다짐하고 새로운 희망을 기원하는 행사였다. 100여 개의 오색 깃발이 행사장 주변에 세워졌다. 무녀의 무당굿도 진행됐다. 이 풍어제에 참가한 위도 주민들은 제물상 앞에 절을 올리며 풍어와 안녕도 축원했다.

그로부터 5개월 뒤인 1994년 10월 10일, 위도 파장금항에서는 서해훼리호 참사 1주기 위령제가 열렸다. 오후 3시, 파장금항 선착장에서 열린 위령제엔 희생자 유가족, 위도 주민 등 200여 명이 참가했다.

이날 위령제는 서해훼리호 참사 위령탑건립추진위원회가 주관했다. 위원장은 유가족인 위도면 대리 출신의 이형용이 맡았다. 이형용은 이날 위령제를 총지휘하며 “다시는 이런 대형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갖고 혼백이 되신 영령을 달래고자 위령제를 올린다”고 말했다.

위령제를 마친 뒤, 이형용 등 서해훼리호 참사 위령탑건립추진위원회 회원과 위도 주민 등은 진리와 시름리 사이에 있는 위령탑 건립예정부지로 이동했다. 이 부지는 서해훼리호 침몰사고 현장인 인당수 해역이 내려다보이는 바닷가에 있다. 서해훼리호 참사 위령탑건립추진위원회 회원과 위도 주민 등은 이 부지에서 희생자 292명의 넋을 기리기 위한 조형물인 위령탑 기공식을 가졌다. 위령탑은 부지 280여 평에 세워질 높이 15m의 석조물이었다. 위령탑 건립 공사는 1995년 6월에 마무리됐다.

이 위령탑 뒷면엔 이런 비문이 새겨졌다.

‘그대는 아는가, 저 바다 우는 소리를. 파도를 헤치고 들려오는 슬픔과 절망의 통곡소리는 아직도 우리 곁에 전율과 회한의 눈물을 마르지 않게 하고 있다.…부디 태양빛을 맞으며 안식의 보금자리를 오롯이 펼치며 고이고이 잠들기를 비는 바이다’

위령탑 뒷면엔 서해훼리호 참사로 희생된 292명의 이름도 적혀 있다.

1995년 이후, 위령탑 앞에서는 매년 서해훼리호 참사 위령제가 열렸다. 위령제는 서해훼리호 위령탑보존위원회가 주관한다. 이 단체의 위원장은 깊은금리 출신인 유가족 신기찬이 맡고 있다. 신기찬은 서해훼리호 참사 때 막내 여동생을 잃었다.

1993년 연말, 서해훼리호 유가족들은 희생자 보상을 아시아나항공기 추락사고 때의 수준으로 해달라고 요구했다. “연안 여객선 운항 지휘 감독기관인 군산지방해운항만청의 감독 소홀로 빚어진 ‘관재(官災)’이니 국가기관의 잘못으로 인한 참사인 만큼 국가가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가족들이 희망하는 보상액은 1억5천5백만 원 정도였다. 아시아나항공기 추락사고는 서해훼리호 참사가 발생하기 3개월 전인 1993년 7월, 목포공항 인근의 야산에서 발생했다. 이 사고로 66명이 숨졌다.

그해 11월 24일, 서해훼리호 유가족배상대책위원회는 해운항만청과 첫 보상 협의를 가졌다. 그 뒤 여러 차례 접촉했다. 물론 공식적인 접촉도 있었고, 비공식적인 접촉도 있었다.

보상 문제를 놓고 벌어진 줄다리기 협상 과정에서 정부의 입장은 조금씩 달라졌다. 초기엔 정부 차원의 보상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정부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정부의 입장이 달라진 것은 서해훼리호 유가족배상대책위원회의 처절한 노력 덕분이었다. 유가족배상대책위원회 사무실은 해운항만청 근처인 서울시 종로 5가에 있었다. 이 단체의 간사는 파장금리 출신인 오한성이 맡았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언론계에 몸을 담은 바 있다.

오한성은 정부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1993년 12월 3일 현재, 230여 명의 보상금 요구액이 취합돼 있습니다. 이들 대부분이 아시아나항공기 추락사고 수준의 보상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배상대책위에 요구액 결정 자체를 위임하고 있습니다. 사망자 중 200여 명의 연령이 20대에서 40대 사이이고 공무원과 정부 산하단체 직원들만해도 96명에 이릅니다. 안전관리 소홀, 위도 주민들의 여객선 증회운항요구 무시 등 정부 잘못으로 사고가 발생한 만큼 적어도 아시아나항공기 수준의 보상은 이뤄져야 합니다.”

유가족배상대책위원회의 이러한 요구에 정부의 태도는 단호했다. 언론은 ‘해운만청이 최대한 원만한 보상 협의를 유도하되 유가족들이 무리한 요구액을 계속 고집할 때엔, 정부의 최종 보상 지원액을 조만간 일방적으로 공개하고 개별적으로 유가족들과 협의를 벌이는 방법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가족배상대책위원회와 정부의 입장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통에 유가족들의 고통은 나날이 깊어 갔다.

1993년 연말이 다가왔다. 정부는 유가족배상대책위원회의 위원장 한 사람을 은밀하게 불러내 보상 문제를 매듭지었다.

정부의 보상대책반이 1993년 연말 유가족배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인 장경국을 불러 합의한 희생자 보상액 한도액은 1인당 평균 9천2백만 원이었다. 장경국은 단독으로 협상 테이블에 나가서 합의서에 서명했다. 유가족배상대책위원회 집행부의 동의도 없이 말이다.

유가족들은 그 합의가 장경국 개인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뤄진 것이기에 무효라고 주장했다. 유가족들은 또 유가족배상대책위원회 집행부를 전면 불신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장경국은 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익산 출신의 장경국은 큰 술집을 운영하던 인물이었다. 장경국이 유가족배상대책위원회 집행부의 동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그런 합의를 한데는 그의 사업과 무관하지 않은 듯 했다.

당시 한 유가족은 이렇게 추정했다.

“암만해도 술장사를 허는 놈이다봉께 정부 관료들이 고놈을 이렇기 협박힜을 수도 있는 일 아닝가? 어이 장 위원장, 여그 합의서에 도장 안 찍으면 어찌끼 되는지 알지? 세무 사찰 들어가면 그동안 안 낸 세금 몽땅 토해 내야 된다고! 으디 그뿐이것어! 까딱 잘못허믄 쇠고랑을 차는 수도 있을턴디…”

어쨌거나 유가족배상대책위원회는 “정부가 대다수 유가족의 의견을 무시한 채 유족 대표 1명과 일방적으로 보상 대책을 타결지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새로운 보상안 마련을 촉구하는 항의 농성에 들어갔다. 간사 오한성 등 유가족배상대책위원회 집행부는 단식에 돌입했다.

1994년 1월 7일, 유가족배상대책위원회는 유가족들과 함께 길거리로 나섰다. 그날 오후 1시경, 상복을 입고 상여를 맨 시위대는 해운항만청 청사 진입을 시도했다.

200여 명의 시위대는 해운항만청 앞길에서 3시간 동안 농성을 벌였다. 시위대는 “정부가 이번 사고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사라지고 유족들이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을 악용해 유가족 대표 1명과 사망자 1인당 9천1백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키로 결정한 것은 대다수 유족들의 의견을 무시한 처사”라고 주장했다.

이날 시위의 선봉엔 유가족배상대책위원회 간사 오한성이 섰다. 그 뒤엔 신기찬, 조희오, 김만수 등 다수의 위도인 유가족들도 서 있었다.

벌써 9년이 지났다. 2002년 10월 9일 저녁, 파장금항 동굴여관 1층 식당에 서해훼리호 위령탑보존위원회 회원들이 모였다. 서해훼리호 참사 9주기 위령제 제물상에 올릴 음식을 장만하기 위함이었다.

“낼 위령제에 군수는 온대여 안 온대여?”

전을 부치다 손등에 튄 기름을 닦아내며 여수댁이 물었다.

한·일월드컵 기간인 지난 6월 13일,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치러졌다. 이 선거에서 위도 출신인 김병갑이 부안군수에 당선됐다. 8·15 광복 이후, 지방단체장이나 국회의원을 지낸 위도인은 단 한 명도 없다. 부안군수가 된 김병갑이 역사상 처음이다. 김병갑은 위도면 딴치도리 출신이다. (부안人신문 7월 15일자에서 계속)

(편집자: 작가 서주원 소설 봉기 4권은 본지 편집방향과 전혀 관계 없으며, 부안 출신 서주원씨 작품을 독자들에게 알리는데 의미를 두었음을 알립니다.)

사진- 작가 서주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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