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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이 들려주는 지포 이야기지포 김구, 부령부안과 뗄 수 없는 근거 제시

지포 김구(1211~1278)
자 차산(), 호 지포(), 시호 문정()
고려 말 대학자, 명문장가
부령부안김씨 중시조

부령부안김씨 대동보편찬위원장 김창원씨 만남은 김형균 선배(前상산고 교사) 전화로 부안 모식당에서 재무부장 보임을 맡으신 김대철씨 등 4명이 합석하여 어느곳에서도 들을 수 없는 귀중한 지포 선생 이야기를 들었다.(자료는 전북대 김병기 교수 논문집을 참고하였음)

질문) 부령에 대한 역사가 부령부안김씨 김春과 연관이 있다고 하는데?
 부령의 역사는 마의태자 아들 기로가 고려 성종조에 아들 희보를 데리고 부령땅 능가산에 찾아와 울금바위 원효방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통곡하며 기원하다 불안감을 느끼고 의상봉아래 부사의방을 거쳐 월명암에서 지내셨고, 태자의 증손 경수가 1070년경 등과하여 우복야, 이부상서에 이르고 호장까지하여 그 후손들이 부안에 세거지를 이루며 번창하고 있습니다.

[김경수 아들 김춘()이 부령부원군()에 책봉()되어 부령을 식읍으로 하사 받아 본관을 부령으로 정했다.] 라고 하는 백과사전 내용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려 헌종의 비가 춘의 딸이라는 설, 하나는 큰 공을 세워 부령부원군 직책과 부령을 식읍으로 받고 관향을 부령으로 했다는 것이지요.

질문) 지포 김구 선생이 부안에 끼친 영향은?

지포 김구는 1240년~1241년까지 원나라에 서장관으로 다녀왔으며, 안향은 1289년~1290년까지 원나라에 다녀옴(따라서 안향보다 50년 앞서 성리학을 유입)

고려말 지포 김구는 선조들의 고향인 부안에 내려와서 10여년간 선학동(선은동)과 지지포를 오가며 성리학 진흥을 위해 강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했습니다.

이후 지방 유림들이 부안읍 학당고개 밑에 소수서원(백운동서원)보다 9년 앞선 1534년(중종29)에 도동서원을 창건하고 지포 김구를 주벽으로 모셨습니다. 따라서 도동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 되는 것입니다.

부안군 변산면 소재 지지포(知止浦) 지명에는 성리학적 세계관이 담겨져 있는데 지포 김구는 후학들에게 주희 성리학의 핵심인 삼강령(三綱領)의 지어지선(止於至善)을 알게 한다는 뜻의 지(知)와 지어지선(止於至善) 지(止) 한 자씩 붙여서 지지포(知止浦)라고 했으며 현재는 그곳 도로명 주소가 '지지포길'로 되어 있습니다.

부안읍 선학동(선은동)에는 간재 선생이 친필로 쓴 지포김구 유허비가 있습니다. 신석정 문학관 뒷편으로 올라가면 있는데 그곳은 지포선생이 살았던 곳입니다. 간재 선생은 조선조 마지막 기호학파 유학자 입니다.

질문) 지포 김구와 아들 김여우, 김승인은 어떤 분이신가요?
지포 김구는 고려말 외교관으로 명성을 떨친 분이시고 통문관(조선시대 사역원)을 설립하여 원나라와의 외교적 마찰을 없앤 일로 유명하고 원나라에 보내는 표문은 거의 지포 김구가 작성하였으며 특히 원나라 학자 왕악이 '공의 표문을 보고도 상면하지 못함이 유감이다.' 라고 하였답니다.

문한공 김여우는 원나라와 결혼동맹을 성사시킨 공로로 고려 충렬왕이 내린 단권(丹券)을 받았으며 단권은 오늘날 화랑무공훈장(전시에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과 같다고 합니다.

김승인은 강릉도안렴사(使)에 부임하여 1313년 우리나라 최초의 강릉 향교를 설립하였다.

질문) 그러면 지포 후손들이 부안에 정착한 시기는
지포 김구의 후손들이 대대로 개경에서 권문세가로 살다가 고려가 망하자 지포의 7세손인 한성소윤 세영과 고부군수 광서 등 4형제가 불사이군의 대의를 좇아 벼슬을 버리고 부안의 옹정(낡은 터)에 낙향하여 지금까지도 세거지를 형성하고 크게 번창하고 있습니다.

부안 석동산에 있는 군사공 김광서를 제향하는 취성재는 호남 제1의 제실이라는 평을 얻을 정도로 규모가 대단합니다.

질문) 김승인의 인(印)과 교동인씨와 무슨 연관이 있다고 하는데..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을 거점으로 하는 교동인씨(喬桐 印氏)가 있는데 김승인 할아버지 후손들이 아닌가 하는 근거가 지포 김구 신도비각 안쪽 자그마한 현판에 전주에 사는 인창섭이 '선조문정공 신도비를 개수한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일만원을 헌금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봐서 우리와 같은 집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당시 헌금액이 가장 많이 낸 종친이 20만원이니까 1만원은 상당히 큰 금액이라서 이런 연유를 찾는 겁니다.

질문) 지포 김구를 제주도에서는 돌문화의 은인이라고 한다는데..
지포 김구 선생()은 고려 고종 17년 단기 3567년 제주판관으로 부임하여 5년간 재임하시는 동안 많은 선정을 베푸신 가운데서도 특히 제주 삼다()의 하나인 돌을 잘 다스려 돌 문화의 은인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1990년경에 제주민속박물관장과 부안김씨 종친회가 의기투합하여 공덕비를 세우고 글은 원광대 교수 김윤길씨가 썼습니다.

공덕비 비문 앞에 [돌 문화의 은인 판관김구선생공덕비()] 라고 적혀있습니다.

마무리) 고려말 대학자 지포 김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분의 업적을 배우려고 하는 후손들이 있어서 부령부안김씨의 앞날이 환해 지는 느낌이 든다. 더욱더 번창 할 것이다.

이제, 지포 김구에 대해 방치 하고 있는 부안군이 해답을 내놓아야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전북 부안군 '도동서원' 흔적만 남아있다.
부령부안김씨 대동보 편찬위원장 김창원

 

 

조봉오 기자  ibuan11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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