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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은 문원文苑의 종장宗匠인데 그도 공을 걸연傑然이라는 말로 칭송하였다“... 문정공 지포 김구

고려 말 지포 김구와 두 아들은 성리학 도입과 보급에 최선을 다했으며, 1274년 부안에 내려와 선학동(=선은동)과 변산 지지포를 오가며 신진 유학(성리학)을 보급하여 부안을 문향으로 이끈 장본인이기 때문에 부안의 인물 첫 번째로 꼽고 있다.

1534년 지방 유림들은 선생의 덕행을 추모하여 부안읍 연곡리에 도동서원道東書院을 창건하였다. 우리나 최초 서원으로 알려져 있는 소수서원보다 9년 앞선 것이다.

2019년 부안읍 연곡리 도동서원 발굴사업

도동서원 발굴사업은 도비 2억 원을 들여 2018년부터 2019년까지 발굴 조사를 완료했으며 추후 복원 사업까지 추진할 계획이며, 전북도에서 추진하고 있는 전라유학진흥원 설립 사업(2019~2023, 김종회 의원 2020년 의정 보고서)과 궤를 같이하고 있어 부안을 인문학 본향으로 만들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지포 김구에 대한 기록은 전북대 김병기 교수가 2019년 출간한 ‘부안扶安(부령扶寧)김金씨 연구’, 김형균-김종원-김창원 공동 저서 ‘부안扶安·부령扶寧김씨 뿌리를 찾아서’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부안(부령) 김 씨 중시조 지포 김구金坵(1211~1278)는 고려시대 문장가로 외교관이며 학자로 본관은 부령(부안)이며, 자는 차산(次山), 호는 지포(止浦),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2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233년 22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가게 된다. 저서로는 지포집이 있다. 묘소는 전북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에 모셔져 있다.

지포 김구의 구坵는 공자의 이름인 공구(孔丘)의 구丘이다. 자는 차산(次山)으로 공자를 산으로 보고 자신을 공자 다음의 두 번째 산 혹은 공자의 뒤를 이을 공자 다음의 산은 바로 ‘나’라는 의미를 취하여 차산次山이라는 자를 취한 것이다.

호는 주자 성리학의 근간을 이루는 《대학大學》에 나오는 3강령 중 최후 완성단계인 지어지선(止於至善:지극한 선에서 멈춤)에서 止자를 택하여 지포止浦라고 하였다. 지포는 이 지역(변산)의 인재들을 모아 교육에 힘썼는데 학생들이나 마을 사람들이나 《대학》에 나오는 지어지선(止於至善)의 止가 의미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는 뜻에서 이 포구마을의 이름을 지지포知止浦라고 명명하였다.(부안・부령김金씨 연구, 205~207p)

지포 김구에 대한 흔적은 도동서원, 유허비, 지지포, 변산팔경 중 지포신경止浦神景, 부안읍 문중로(부안고 인근 도로) 등이 남아 있다.

부안(부령) 김 씨 본관 유래와 지포 김구에 대한 기록

부령(扶寧) 김 씨 본관이 최초로 밝혀지게 된 계기는 9세손 김구 묘지석에 부령인扶寧人이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들고 있으며, 부령扶寧 본관에 대해서도 5세손 춘(春) 공께서 부령부원군의 작호를 받고, 손자 작신(作辛) 공께서도 부령군의 군호를 받아 부령김씨로 본관을 삼았다고 한다.(뿌리를 찾아서, 22p)

조선조 홍문관 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낸 정실(鄭宲1701~1776)이 신도비神道碑를 짓게 된 연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어느날 좌랑 김동직과 그의 동생 김동호가 호남지방으로부터 찾아와서 부족한 나에게 그의 선조인 문정공의 신도비문을 찬술해 줄 것을 부탁했다. 생각해보니 시대는 멀어졌고 행적은 분명하지 않아 고증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들 형제가 가지고 온 기록 중에 석담石潭(율곡 이이의 다른 호) 이이李珥 선생이 지은 문정공의 후손에 대한 문장이 있었는데 이 문장에는 “부안의 이 김 씨들이 대대로 선행을 쌓고 공적이 현저하고, 맑은 명예를 온 세상에 드러냈고 가문의 법통을 대대로 이어갔네” 이것은 석담 선생이 근본을 추구하고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고자 하는 뜻을 기술한 것으로 볼 수 있으니 ‘현현청예 질질가법(顯顯淸譽 秩秩家法)’이라고 한 것은 대개 문정공 대로부터 쌓아올린 음덕 때문이라고 할 것이니 이 구절만으로도 비명을 삼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뿌리를 찾아서, 100p)

전북대 김병기 교수는 매년 12월 부안3현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2017년 학술대회는 ‘麗末 名賢 文貞公 止浦 金坵의 行蹟과 追享’, 2018년 학술대회는 ‘止浦 金坵 思想의 革新性과 牧民의 휴머니즘’이라는 주제로 지포 김구에 대한 위상 정립에 몰두하고 있다.

2019년에 출간한 ‘부안扶安(부령扶寧) 김金씨 연구’ 머리말에서 이 책이 한국의 성씨 연구와 한 문중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하고 있다.

‘부안扶安·부령扶寧김씨 뿌리를 찾아서’에서 발행인 김삼철(부안·부령김씨 서울경기종친회장)은 책머리에서 ‘뿌리를 아는 것은 나의 혼을 아는 것’이라고 밝히며, “이 책자가 우리 집안 청소년 뿌리교육 자료가 되고 수시로 읽어 자부심과 긍지의 원천으로 삼기를 바란다.”라고 적고 있다.

부안김씨 후손들은 대대로 선조에 대한 고마움과 역사적 가치를 배우는데 게을리 하지 않는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지포 김구와 두 아들은 고려 말 성리학 도입과 보급에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성리학을 도입한 사람은 안향(1243~1306)으로 알려져 있지만, 안향 이전에 도입되었다는 설을 제기하는 측에서는 고려 중기에 이미 북송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실제로 고려의 학자들이 중국에 가서 송나라 학자들을 직접 만나고 왔다는 기록도 있었으므로 북송시대의 성리학이 고려에 이미 수입되었을 것이라는 견해와 김구가 나이 30세(1240년)에 서장관 직으로 배정되어 몽고를 다녀온 기록을 보더라도 1243년에 출생한 안향보다 성리학 도입에 선구자적 역할을 한 점을 상정해 볼 수 있다.(김金씨 연구, 156~169p)

《고려사절요》에는 ‘어느날 최이는 이규보에게 “누가 공을 이어서 문형門衡을 잡을 만 하오?” 하고 묻자, 이규보는 “사학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학유 최안(=최자)이라는 사람이 있고, 급제한 김구가 그 다음입니다’라고 하였다. 당대 최고의 문호인 이규보가 과거에 급제하여 아직 관직에 나가지도 않은 김구를 천거했다는 것은 김구의 문장이 일찍부터 크게 인정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규보와 김구의 인연은 다음과 같다. 이규보가 32세에 받은 첫 관직은 부안에 자리한 변산邊山의 소나무를 베어 목재를 확보하는 직책인 작목사斫木使 였으며, 김구가 예부시에 급제하던 1230년경 유배를 갔던 곳도 부안 위도蝟島였다. 이처럼 이규보는 부안과 인연이 깊다.(김金씨 연구, 123p)

지포 김구는 자식(김여우, 김승인)들과 함께 성리학 보급에 앞장섰다. 김구 아들 김여우는 몽고에 4년 동안 머물며 당시 몽고에 형성된 유학 부흥의 동향과 문화적 분위기를 살폈다.

몽고의 분위기를 현지에서 인지함으로써 귀국 후에 아버지 김구와 함께 유학 부흥에 노력하였다. 당시 김여우를 만난 원나라 황제는 김여우에게 ”고려에서는 문묘를 세워 공자를 모시고 있느냐?“는 질문을 하였고 그런 질문을 받은 김여우는 우선은 있다고 답한 후 곧바로 강릉안렴사로 재직하고 있는 동생 김승인에게 문묘를 세우라고 한 것이다.

1930년 발간된 《부안읍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강릉향교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강릉도호부 북쪽 3리에 있다. 동쪽 모퉁이에 항아리 같은 바위가 있으며, 항간에서 연적암이라고 부른다. 고려 김승인이 존무사가 되어 화부산 밑에다가 처음으로 학사를 창설하였다.’ 특히 김승인이 세운 강릉향교는 제향공간으로서의 ‘문묘’의 기능과 교육기관으로서의 ‘향학’의 기능을 다 구비한 향교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최초라는 설명이 덧붙여 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김金씨 연구, 275~278p)

고려 말 지포 김구 외교 활동과 성리학에 대한 내외국인 평가

지포 김구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뛰어난 외교관으로 자질과 학문적 깊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고서를 통해 알려져 있다. 《고려사·열전》 및 《동국통감》, 《여사제강麗史提綱》, 《동사회강東史會綱》, 《동국사략》 등에 ”김구는 글을 잘 지어···중략···원나라로 가는 표문 등 모든 문서를 다 담당하였는데 쓴 글의 내용이 모두 이치에 맞아서 그가 쓴 글로 인하여 원나라 황제로부터 고려가 많은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원나라 한림학사였던 왕악王鶚은 김구가 올린 표문을 볼 때마다 매우 아름다운 문장이라고 평하면서 김구를 직접 만나볼 수 없음을 한탄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김金씨 연구, 188p)

특히 정실이 지은 신도비(전북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 소재) 말미에서 또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은 경전과 학술로 당대를 풍미한 군자인데 그도 공의 훌륭한 덕행을 들어 공을 추앙하였으며,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은 문원文苑의 종장宗匠인데 그도 공을 걸연傑然이라는 말로 칭송하였다“고 하면서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공은 우뚝 솟은 인물이었고 전대의 명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는 대목이다. 조선시대 초기 당시 문한을 담당했던 서거정과 퇴계 이황과의 도학 논쟁으로 조선의 사상가에 우뚝 솟은 인물인 기대승으로부터 이처럼 높은 평가를 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김金씨 연구, 156p)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선은동에 있는 문정공 지포 김선생 유허버(文貞公 止浦 金先生 遺墟碑)는 1912년 조선조 마지막 유학자 간재 전우田愚 선생이 직접 쓴 것으로 비문의 내용은 다음고 같다. ”고려 평장사 김문정공의 후예가 공의 유허지에 비를 세우며 우(愚)에게 음기를 부탁함으로 우愚가 공(문정공)의 연보를 보니 부령 선학동에 사셨으며 또한 지지포에 집을 짓고 거문고와 글 읽기로 소일하시면서 후학을 양성하여 인재를 배출하였다. 유허지인 이곳 선은동은 옛적 선학동이다. 공께서는 일찍부터 내시들이 머리 깍고 오랑캐의 옷을 입는 것을 힐책하시고 또한 권신이 불경을 조각함을 조롱하시고 당시 오랑캐들의 제도와 불교의 횡령을 감히 막을 수 없었는데 실로 높은 식견과 담력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나지 않았으며 누가 감히 그와 같이 규탄하였겠는가? 돌이켜보면 지금도 서양 오랑캐들이 사회가 혼란함을 틈타 사교를 전파하고 세상을 어지럽혀 예의와 삼강오륜이 사라질 지경에 이르렀는데 공께서 만일 계셨으면 그들을 쫓아내지 않고 이와 같이 방과하겠는가? 많고 많은 그 유풍과 여운을 상상해보면 높은 산과 같이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할 뿐이다. 공 돌아가신 후 635년 임자(1912년) 10월 담양潭陽 전우田愚 삼가 씀“(뿌리를 찾아서 133~134p)

지포 선생은 고려 말 원나라에서 조선조를 거쳐 일제 강점기까지 유학자들에 의해 거듭나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부안읍 연곡리 도동서원이 흔적만 남아 있다거나, 부안읍 선은리 지포 유허비가 있을 뿐 지포 김구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고려 말 통문관(국립통역양성기관) 설치와 제주 돌담 문화유산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 경지재 옆 신도비에 나오는 지포 김구의 통문관(현 한국외대 수준) 설치에 대한 내용이다. ”청컨대 통문관을 설치하시고 금내학관에 명하시어 참외문신들 중에 젊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어를 외워 익히게 함으로써 번역하는 언어의 실수를 바로 잡으소서“라는 부분을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봐야 하는데 바로 김구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립통역관양성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통문관’의 설치를 건의하여 실행에 옮겼다는 점이다.(김金씨 연구, 155p)

22세 지포 김구는 제주도 판관 재직시 백성들의 고충을 헤아려 실시한 돌담 치적에 대한 기록이 여러 곳에 나온다.1239년(고종 26)까지 6년 동안 제주판관의 직무를 수행하였는데 당시 제주 부사는 최자였다. 당시 제주는 육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유배지에 해당하는 험지였기 때문에 높은 관직의 제주 부사는 발령을 받고서도 임지에 부임하지 않고 그대로 개경에 머물러 있는 날이 많았고, 대신 실무 담당자인 판관이 실지로 제주의 행정을 도맡아 처리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구는 목민관으로서 적지 않은 치적을 보임으로써 제주 백성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들었다. 김구의 제주도 치적과 관련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탐라지》 등에 기록이 남아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그를 명환(名宦: 이름난 관리)으로 칭하면서 《동문감》을 인용하여 그의 치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땅에는 돌이 많고 건조하여 본래 논은 없고 오직 보리·통·조만이 생산 된다. 그 밭이 예전에는 경계의 둑이 없어서 강하고 사나운 집에서 날마다 차츰차츰 먹어 들어가므로 백성들이 괴롭게 여겼다. 김구가 판관이 되었을 때에 백성의 고충을 물어서 돌을 모아 담을 쌓아 경계를 만드니 백성들이 편리하게 여겼다. (김金씨 연구, 127~128p)

제주에서는 지포 김구를 돌 문화의 은인으로 칭송하고 있으며, 2014년에는 제주 밭 돌담이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세계중요농업유산에 지정된 바 있다. 아울러 제주 밭 돌담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부안은 지포 김구의 관향이다. 2023 새만금 잼버리 대회에 참가하는 스카우트 대원 5만 명에게 ‘지포 김구와 성리학의 본향 부안’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한편 부안군 의회 군의원으로 의정 활동을 하고 있는 부안(부령)김씨 후손은 김정기 군의원, 김연식 군의원이다.

조봉오 기자  ibuan11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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