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범 전 국회의원 보좌관

20년을 되짚어 ‘어떤 일’을 회상한다는 것은 ‘그 일’에 대한 내 방식의 갈무리이다. 그런데 그 같은 갈무리가 스스로부터가 아니고 외부로부터 가져온 것이라면 나의 생각은 더없이 복잡해진다. 더욱이 외부로부터 온 그것이 한 인간의 생명에 관한 것이라면 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내 가슴과 머리는 자학에 가까운 상념으로 가득 채워질 때도 있다.

며칠 전 택배노동자의 죽음을 담담히 알리는 저녁뉴스 한 컷이 나를 20여 년 전의 기억 속으로 몰아넣었다. 금년만 해도 벌써 8명의 아까운 택배노동자가 유명을 달리했다고 전하는 앵커의 목소리마저 가느다랗게 떨렸다. 왜 이런 죽음이 반복되는 것일까? 대책은 없는 것일까? 추석연휴를 맞아 택배물량이 급증할 즈음에 택배물품의 분류를 거부하려던 택배노동자들의 몸부림을 기억하고 있던 나로서는 너무도 의외의 뉴스였다. 그렇게 내 기억도 함께 몸부림치고 있었다. 비록 3개월간의 알바였지만 택배노동자의 시간은 내겐 아주 소중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한국의 현재와 독일의 과거 노동환경정도에 불과할 텐데 말이다.

택배알바를 했던 3개월간을 기억하며 머릿속을 뒤집어 하나하나 눈앞에 펼쳐놓아도 내겐 행복했던 기억이 먼저다. 독일의 바이에른 주도인 뮌헨의 서편 외곽에 있는 뮌헨중앙우체국 물류단지에서 3개월간 택배알바를 했다. 우체국 택배알바는 야간 우편분류 알바, 자동차(BMW)공장의 알바와 함께 시간당 임금이 가장 높아서 인기알바였다. 유학생은 방학 때만 풀타임 알바를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벌써 23년 전의 일이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노동환경에 차이가 너무 큰 것 같다. 23년 전의 독일노동환경이 현재의 한국노동환경보다 더 좋았다는 말인데 의아할 뿐이다. 우리택배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노동의 고통을 그때 나는 겪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법제도와 우편분류시스템과 상주하는 근로감독관의 철저한 근로준칙의 점검이 있었기 때문에 난 우체국 누구와도 동일노동에 관련하여 차별 없이 똑같은 노동의 처우와 임금을 받을 수 있었다. 상해보험혜택은 물론 세금까지 돌려받을 수 있었다.

뮌헨중앙우체국 물류단지에 7시 전후로 도착하면 밤새 분류된 택배물량 200~250개를 탑차에 싣는 일은 내 차지였다. 물품마다 일일이 스캔하고 탑차의 주소지별 칸칸마다에 옮겨 싣고 담당구역으로 출발하면 되었다. 누구의 신호도 없는데 거의 동시간대에 수많은 노란탑차들이 우체국을 나설 때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처음 1주일간은 근로감독관의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너의 안전”이라는 응원을 받으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나섰던 걸 기억한다. 그 1주일간은 나의 사수가 운전을 했다. 그는 내게 담당구역을 익히는 법과 주정차금지구역에서도 당당히 주정차하는 법과 가장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일머리를 친절하고도 세심하게 알려주었다. 지금도 고마운 기억 속에 있는 폴란드 출신 우체국직원이었다. 그는 내가 일했던 3개월간 틈틈이 내게 묻고 알려주고 현장에서 어려움은 없었는지 세심하게 챙겼다. 내가 담당했던 구역은 뮌헨중앙역 앞 남쪽부터였고 길고 긴 몇 개의 도로를 지나 대학병원 주변으로 이어진 주택가에서 끝나는 뮌헨의 중심이었다. 초보에 학생알바라고 배려해준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들이 왜 합리적인지 그 때 알바현장에서 알게 되었다. 알바첫날 근로담당관이 여러 준칙을 알려 주었는데, 임금과 휴식 및 현장에서 부딪히는 고객대응방안들이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내게 배당된 택배물량만 배달을 완료하면 언제든 퇴근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공부시간을 확보해야 하는 내게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어디에 있겠는가. 임금시간은 당연히 8시간 그대로 쳐주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많은 날을 5시간 만에 배달을 완료하고 퇴근했었다.

배달팁도 매일같이 상당히 받았다. 폴란드인 사수가 내게 팁에 관한 설명을 해줄 때는 담담했는데 막상 첫팁을 받고선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던 걸 기억한다. 그에게 5마르크-당시 환율이 1마르크가 600원 안팎이었을 것이다-를 받았다고 보여줬더니 횡재했다며 덩달아 기뻐해줬다. 사무실에서나 근사한 옷차림을 한 사무노동자들은 거의 팁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은퇴 후 연금으로 사시는 노인들은 대부분 팁을 손에 쥐어 주었다. 택배가 오는 날이면 노인들은 팁을 미리 준비하고 택배차량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에 현관문을 열고 나오시는데 그리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이따금씩 상상을 넘는 금액을 팁으로 받은 적도 있었다.

외로운 노인들은 택배알바인 내게서 뭘 느끼셨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택배알바 마지막 날, 일일이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인사를 건네는 그때 '그 궁금증'이 풀렸다. '정'이었다. 특히 혼자 사시는 노인들이 내게 보내는 특유의 정-독일 가정집에서 8개월 정도 기거할 때 이미 느꼈다-이었다. 택배배달부와 함께 나누는 몇 마디 시간이 그분들에겐 하루 중에 맞보는 사람냄새였다. 사람냄새가 짙게 배었던 택배알바였다. 택배알바가 몸에 길들여지는 처음 며칠을 빼고는 나는 알바의 고통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일터는 그래야 되지 않겠는가.

다시 기억에서 벗어나 며칠 전 뉴스에서 접한 택배노동자의 안타까운 죽음을 돌아보면 우리의 현실은 참 먹먹하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일반대중과 가장 가까이서 대면하는 노동자들이 겪는 처우가 더 열악하다는 노동현실이 참 먹먹하다. 동일노동에 동일임금이 뒤따르지 않는 현실이 먹먹할 뿐이다. 이 판국에 노동귀족은 또 무슨 말인가. 23년 전에 독일에서 가능했던 노동현실이 왜 우리 노동현장에선 이뤄질 수 없을까?

법제도나 시스템에 큰 구멍이 났을 수도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사회가 가져온 과도한 택배물량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과한 '욕심'때문이 아닐까. 더 많은 소비가 더 이상 아름다울 수는 없다고 경고한 생태경제학자인 에른스트 슈마허를 떠올리는 현실이 참 버겁다. 과도한 노동이 죽음을 불러오지 않을 정도의 노동여건이 갖춰지면 좋겠다. 배달과 분류는 엄연히 달리 봐야 하는 업무임에 틀림없다. '배달은 배달, 분류는 분류'가 제대로 이뤄져야 택배노동자의 숨통이 터질 것이다.

+ 사랑하는 가족 곁을 먼저 떠난 택배노동자 8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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