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범 전 국회의원 보좌관

서울에 살면서 가장 좋았던 일 중의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책읽기를 꼽을 것이다. 맘만 먹고 발만 빠르다면 얼마든지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제대로 골라 시간을 붙들어 놓고서라도 그들과 친구 삼을 수 있는 공간이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교보문고가 그랬고 대학도서관과 정독도서관이며 국립중앙도서관이 그랬다.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넘어가는 그 서래플공원이었던가? 아직 있는지 모르겠다. 이따금씩 집근처 헌책방도 시간을 붙들어 놓기에 딱 좋은 놀이터였다.

좀 더 나이 들어서는 국회도서관에 푹 빠져 책읽기의 심연에서 한동안 헤어나질 못했었다. 죽어라 읽어댔고 죽어라 잊어버렸던 그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책에서 뿜어져 올라오는 냄새가 좋아서 틈만 나면 나는 도서관에 얼굴을 내밀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서로 다른 냄새가 오롯이 전해질 때의 그 느낌이 나는 좋았다. 책 냄새가 혼돈과 혼미 그 자체였던 적도 더러 맛보았으니 더 설명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랬던 내가 변했다. 점점 지나간 시간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남들이 먼저 읽은 책에는 손길이 잘 가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도서관에 가서도 늘 새로 나온 책들만 찾게 되었고, 때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옛날 책들로만 눈길이 갔다. 새 책을 찾는다는 핑계로 책읽기가 좀 뜸해졌다.

책을 구매해서 읽다보니 더욱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책읽기는 털어내고 촌(村)살이에 빠져 몸도 피곤하고 맘도 나른한 모든 시간들을 즐겼다. 마침내는 책을 구매하는 것도 차일피일 미루기가 일쑤였다. 구매했던 책마저 읽지 못하고 슬며시 서가에 얹어놓곤 했다.

가까이에 있는 사무실에서 나와 외근을 가는 날이었다. 내가 책임진 업무가 책상에만 앉아있을 수 없었던 업무인지라 그날따라 평상시와 달리 도서관에도 들르고 싶었다. 그렇게도 우연찮게 찾아간 부안교육문화회관 자료실이었다.

뜻밖에도 난 그곳에서 예의 그 책 냄새를 맡았다.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너무도 기뻤다. 얼마나 고대했던 냄새였던가. 작지만 정연하게 놓여있는 서가들 사이로 걸어가는데 책들이 앞을 다투어 자기네들 냄새를 뽐내고 있었다. 스쳐가는 내 눈길과 손길을 확 낚아채는 녀석들도 있었다. 나이 찬 녀석들은 쌈박하지 않아도 의미 넘치는 냄새로, 나이와 달리 소갈머리 없는 녀석들은 덤비듯이 달려왔고, 금방 태어난 아이들은 말도 못하고 수줍게 웃고만 있었다. 그 때가 내가 부안에서 처음으로 도서관을 찾은 날이었다. 당시에도 서너 개나 되는 작은 도서관들이 내 주변에 있었는데 애써 외면하고 살았던 것이다.

그렇게 등졌던 작은 도서관에서 나는 뜻밖의 횡재를 건졌다. 먼저 챙기는 게 임자라고 남의 손때가 묻지 않은 책들을 우선적으로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읽고자 하는 책들이 없을 때는 구매요청을 넣는 것은 덤이었다. 빨리 읽고 싶은 신간들은 내가 직접 동네서점에 가서 구매신청을 하고 4~5일 만에 도서관 이름표를 달기도 전에 내가 읽을 수 있었다.

동네서점에서 직접 구매신청을 하는 경우 1년에 5책으로 한정된다는 게 좀 아쉬웠다. 아쉬운들 어쩌랴. 시스템이 그렇고 도서관 방침이 그렇다는데. 그래도 이는 서울살이에선 느껴보지 못한 작은 도서관의 유쾌한 반란이었다.

그렇게 세상은 변하고 있다. 나의 책읽기도 변하여 작은 도서관을 잘 활용하고 있다. 장장 2,000쪽에 달하는 3책, 혁명가이자 사상가이고 문필가이며 정치재앙의 희생자인 위대한 ‘트로츠키’ 평전도 나는 그렇게 읽었다.

1책이 1,000쪽이 넘는 E.K.헌트의 경제사상사는 또 어떤가. 최근에 읽었던 이 책들은 도서관이 아니면 그렇게 빨리 읽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딱 14일 동안이기도 했지만, 작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을 읽지 않고 돌려보낸다는 것은 책들에게 미안함을 덧입히는 것이라 여겼다.

‘후회가 꿈을 대신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늙기 시작한다.’라고 미국 대통령을 지냈던 지미 카터가 말했단다. 그중에서도 책을 읽지 않은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나는 작은 도서관을 틈나는 대로 찾아갈 것이다. 꿈이 있다면 백발이어도 청년이라는데 꿈을 찾아 떠나는 나는 아직 청년인가. 그런데 기한 내에 마쳐야 하는 책읽기는 상당히 중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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