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범 전 국회의원 보좌관

평화이리라. 한 점 구름도 없이 해맑은 비색하늘에 바쳐지는 어머니의 기도는 평화리라. 거기 기도로부터 전해져 오는 모든 인연의 태동과 절멸이 어찌 어머니가 보내는 평화보다 더한 연(戀)으로 피어날 수 있단 말이던가. 삼라만상에 뿌리내리고 훨훨 나는 어미와 자식이 거기 있었다. 비취상감청자의 무늬, 학이 되어 날고 있었다.

일주일 새에 읽었던 장편소설 제주43평화문학상 당선작이 4책에 이른다. 제1회 구소은 작가의 검은모래, 제3회 장강명 작가의 댓글부대, 제4회 정범종 작가의 칼과 학, 제6회 김소윤 작가의 난주. 제주43평화문학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바로 그 소설 ‘검은모래’는 몇 해 전에 읽었던지라 요번이 두 번째였다. 섬세하고도 절제된 언어의 품격으로 희끗한 머리를 지닌 사내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그 검은모래.

댓글부대를 제외하고 나머지 소설의 공통언어는 다름 아닌 연(戀)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단정했다. 특히 어머니가 쏟아내는 애절한 사모이고 그리움이었다. 자식이 치받는 사모와 그리움 속에 천륜을 거스르지 못하는 삼라만상이 있었다. 흙과 물과 바람 그리고 불! 그 속에 어머니와 자식의 인연이 쑥쑥 자라고 있었음을. 그 억한 감정이란 눈물을 만들어내는 신파조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막아도 도로 나오고 틀어막아도 또 새어나는 눈물샘을 그 누가 막을 수 있었을까. 글자 하나에 툭, 말꼴 하나에 툭툭.

그 인연을 어쩌지 못하고 정신없이 대지를 치받으며 울림을 떨쳐낼 때, 그 누군들 찾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천지신명께 바치는 어머니의 기도, 정화수를 떠놓고 드리는 어머니의 기도는 자식 앞에서만큼은 꾹꾹 눌러 담는 고봉밥이었던 것을. 나는 그리 보았다. 새벽 장독대에서 동녘하늘을 바라보며, 쉼 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손바닥이 저리도록 빌고 또 비셨던 어머니를.

작가 김소윤이 그려낸 난주도 그랬던가. 천주쟁이어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지아비 황사영을 잃고 멀리 제주로 떠밀려가는 경헌의 어미로서 자식을 살리기 위해 자식을 버려야 했던 정난주도 그랬던가. 그 타는 심장으로 기도했을까.

주님, 저의 주님,
온 땅의 생명을 뿌리고 거두시는 주님이시여,
어린이 젖먹이들의 몸에서 악신의 저주를 거두고
그들의 입으로 살아 있음을 기뻐하게 하시고
오직 성령의 기적으로 보호하여 주소서.
하늘 위 전능하신 당신의 손길로 이들을 만드셨사오니
이 땅의 숱한 죄악을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기꺼이 그들의 생명을 축복하소서.
주님, 저의 주님.

흙과 물과 바람 그리고 불!로 생명을 불어넣은 비취상감청자의 무늬, 학이 살아 날아올랐던 것처럼 삼라만상의 연이 어미와 자식을 학처럼 날게 했을까. 자식에 대한 어미의 피눈물 빼는 애절함이 한 쌍의 학처럼 날았던 것은 구소은 작가의 검은모래에서도 한결같았는데.

어머니의 기도로 빚었던 연(戀)꽃은 다른 땅에서도 피어나 바람에 실려 오갔다. 제주향미를 달고 프랑크푸르트와 파리까지 날았던가. 두 해전에 읽었던 구소은 작가의 ‘무국적자’의 어머니와 자식이 비취상감청자의 무늬, 학처럼 내게 날아들었다. 너무도 강렬했다. 그 때의 기억들이 내겐. 내가 경험했던 소소한 일들이 구만리를 날아 내게 왔으니. 어미를 기다리는 처마 밑 제비처럼 하염없이 어머니를 기다렸던 기수가 내게 왔다.

커피향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 같았다. 그 사람을 간간히 떠올리면서 커피 한 잔을 급히 걸렀다. 루왁-사실 나랑은 딱 한 번 눈 맞추며 시음을 할 정도의 작은 인연이 있었을 뿐이어서-보다는 이름만큼이나 맛도 예쁜 예가체프로 그 아린 맘을 달랬다. 무국적자(Apatride, Heimatlos)에 등장하는 박희준 아니 김기수 말이다. 역병이나 진배없는 코로나19를 피하느라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에서 파리의 골목들을 더듬고 있을까.

새벽공기를 가르며 다짜고짜 전화울림통이 들이닥쳤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연으로 맺었던 형제였다. 이미 정년을 훨씬 넘긴 채 여전히 독일에 거주하는 파독광부와 간호사까지도 무국적자를 읽고 싶다 해서 나는 적잖이 놀랐다. 자기네들 이야기이니 그럴 만도 하리라. 여전히 독일로 돈벌러갈 때의 감성을, 식성을 그대로 지니며 거기 터줏대감들처럼 살고들 있으니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무국적자를 보내드리는 것으로 전화는 끊겼다. 어스름이 스러지는 그 시각에 나는 김기수의 커피를 온몸에 퍼뜨려가며 무국적자를 펼쳐들었다.

“기회는 늘 있었지만, (중략) 어리석게도 언젠가 사라져버릴 기회라는 걸 깨닫지 못했어. 이렇게 가슴 아픈 후회는 내 아둔함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해......” 무국적자 김기수. 어쩌면 한국과 프랑스에서도 몽땅 내동댕이쳐진 김기수, 그를 품안에 안은 또 다른 무국적자 어머니는 신에게 온몸을 불살라 기도로써 갈망한다.

“내 아들이 남겨준 추억 하나만 갖고 가게 해달라고. 나의 행운은 여기까지이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어.”라면서. 애틋하다 못해 절망 섞인 슬픔이다. 죽어가면서까지 품지 못한 아들이라니.

나 또한 내 어머니를 기억해냈다. 가슴이 먹먹하고, 눈 속을 붉히면서, 아스라한 뮌헨시절을 떠올리면서, 지난했던 IMF 서울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에서 무국적자로 살아가는 재일한국인들의 ‘검은모래’를 되씹으면서 손끝이 아리도록 기억의 속살을 더듬어 갔다.

내 어머니가 내 어머니의 자식과 연의 끈을 잃지 않으려 몸부림치셨을까. 환청처럼 내 몸을 감싸는 기운이 역력했다. 커피향이 묻어난 흙과 물과 바람과 불이 삼라만상의 기운을 쐬고 나서야 제대로 만들어지는 비취상감청자의 무늬, 학이 되라고 내 곁을 그렇게 떠나지 못하신 거였구나.

주님, 저의 주님!
세파에 휩쓸릴까 저를 여적 놓지 못하는 제 어머니,
이 땅에서 주님의 영광을 영접하시려는 제 어머니를
이젠, 주님의 품안으로 이끄소서.

자식을 품은 세상의 모든 어머니의 이름으로
흙과 물과 바람과 불, 삼라만상 위에
주님의 평화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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