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범 전 국회의원 보좌관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 했다. 매번 반복되는 이런 말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그래도 일기예보인지라 신경을 써서 나갈 채비를 했다. 내피가 있는 홑겹바지건만 윗도리는 벌써 3겹으로 둘렀다. 어차피 운전해서 갈 건데 이렇게 둘러도 되나 싶었지만 최종 목적지에서 얼마간을 걸을 수도 있다는 걸 핑계로 외투까지 4겹의 윗도리로 몸을 감쌌다. 눈도 쌓였을 테니 털신도 챙겨 신었다.

바람은 쌩쌩했고 이미 대설주의보는 내려졌기에 나름대로 중무장을 한 것이었다. 엊그제도 대설주의보가 내려졌지만 얇은 홑이불을 덮어놓은 듯 바람에 날리고 햇볕에 금세 걷히고 만 눈이었다. 대설주의보나 대설경보가 내려진 변산골의 첫눈이 이렇듯 소담스런 적이 없었는데 요번만큼은 어찌 눈이 시원찮았다.

대설주의보와 함께 걷는 세밑풍경은 알게 모르게 소시민의 맘을 설레게도 하는갑다. 그런데 어지럽게 흩날리는 눈발처럼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가 영 눈에 거슬린다. 진인(塵人)의 눈에도 그 꼬라지가 거슬려 힘들게 눈을 감고 마는데, 세상 부귀영화를 영원불멸처럼 누리고자 애쓰는 작자들은 어떨까.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살기에 혈압이 치솟는 작금의 세밑이다. 언젠가 게거품을 물고 입속에 가둬 둔 욕지거리들을 쏟아낼 날이 있을까.

기왕에 감은 눈은 뜨지 말자 했다. 욕지거리들은 그대로 입속에 가둬놓자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감은 눈 속을 헤작이며 왜 깨복쟁이 시간들이 자꾸자꾸 밀려오는지 모르겠다. 기왕 눈감았으니 그 때로 달아나고 싶어서인가.

허긴 코로나19가 확산일로에 있는 세밑에 깨복쟁이들의 안부가 궁금한 것은 인지상정 아니던가. 코로나19로 금년에는 만나지 못했던 깨복쟁이 친구들이 아니었던가. 이맘때쯤이면 온 동네안길을 놀이터로 삼았던 깨복쟁이들이 아니었던가. 얼음지치기나 연날리기도, 팽이나 딱지(페딱지)치기와 구슬과 땅따먹기까지 온통 동네안길이 우리들 무대였다. 자치기와 재기차기도 했었고 말타기나 달구경도 동네안길에서였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은 약간 언덕진 곳으로부터 아래로 쭈욱 내려와야 동네고샅이 나타난다. 길 양옆으로 집들이 열 지어 있는 아담한 동네이다. 그 비탈진 길이 우리들 깨복쟁이들의 놀이터였다. 언강생심 놀이기구가 있는 놀이터는 꿈도 꾸지 못했던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다. 눈 쌓인 고샅을 뭉쳐 다니며 대나무스키(?)를 탄다고 빙판을 만들었던 걸 경험했던 적이 있는가. 우리동네 깨복쟁이들은 겨울에도 그렇게 동네고샅을 갈고 다녔다.

그런 곳에서도 꿈을 심고 키워냈다. 봄날에 아지랑이 피어오르듯이 깨복쟁이들의 꿈도 스멀스멀 옷깃을 헤집고 기어 나오던 시절이었다. 누구나 그랬듯이 정말로 꿈이 많던 시절이었다. 그때 기어 나오던 꿈은 누가 잡았을까. 그들에게 잡힌 그 꿈은 이뤄졌을까.

내게 들른 꿈도 참 컸던 시절이었다. 이 어지러운 세밑에 내가 욕지거리조차 쏟아내지 못하고 있는 건 여전히 그 같은 꿈을 간직하고 입신양명(立身揚名)하고자 시간과 사투를 벌이는 총생들을 생각해서이다.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훨씬 낫겠다는 생각에서이다.

돌이켜보건대, 꿈은 기대치여야 하고 차곡차곡 딛고 일어서 오르는 사다리여야 한다. 실패로부터 스러지지 않고 오뚝이가 되어야 하는 게 꿈이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절엔 오뚝이도 함께였다. 그런 깨복쟁이 시절이 있었다는 걸 오히려 감사해야 할까. 울화통이 터져 욕지거리가 입을 닫게 만들고야 마는데도.

그런저런 이유로 나는 아직도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총생들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꿈을 버리지 못한 채 자꾸만 키워내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이제 사장(死藏)된 말이나 다름없는 세상에서 총생들의 꿈마저 짓이겨지는 제반 사회행태에 울화통이 터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바깥세상과는 딴판인 차속에서 나는 잠시 꿈속을 찾아 헤매었다. 매서운 칼바람을 타고 내달리는 눈발이 더욱 거세졌다. 그 사이 변산 끝자락 봉래산 해변이었고 새만금방조제를 지나쳤다. 송포항 포구너머 자리한 마실길을 비껴서 고사포 해안길과 수성당이 있는 적벽강을 지나 채석강과 솔섬에서 모항에 이르는 길을 털신발자국을 도장 찍듯이 새겨 넣었다. 총생들에게도 내게도 꿈이 있는 길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 어지러운 세상이 그렇게 놔둘 것 같지가 않다. 때마침 변산 골프장과 리조트 개발사업 추진을 위한 사업자 선정이 되었다 하지 않는가.

제발 총생들의 꿈을 키워내는 개발사업이 이뤄지길 나는 간절히 바란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겠단 애당초의 생각에서 꿈 깨라고 내 머리가 자꾸만 꿈틀거린다. 20여년을 앞선 꿈이 있고 20여년을 늦게 찾아 온 꿈이 있다. 그 꿈을 지키는데 울타리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먼저 왔다고 몽땅 내팽개쳐야 하고, 나중에 왔다고 몽땅 차지한다면 내팽개쳐진 몰골들은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만큼 야속하지 않겠는가.

그나저나 꿈 많은 총생들에게 울타리 같은 멘토가 필요한 때다. 나는 울타리 같은 멘토가 될 자질을 품고 있는가. 멘토는커녕 내가 무엇을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참으로 난망하고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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