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범 목요칼럼]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조인범 전 국회의원 보좌관

쥐띠 해 마지막 날을 앞두고 이웃고을 광주로 출장 아닌 출장을 다녀와야 하는 날이다. 그런데 웬걸, 마당 담벼락 너머 드넓게 트인 논배미가 온통 소복이 눈가루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아침뉴스에선 우리 고을을 비롯하여 위아래 시군 모두가 대설경보에 휩싸여 있단다. 그것도 2~3일 동안이나 계속해서.

내가 지나는 길목 모두가 눈 속에 딱 파묻힐 징조다. 곱디곱게 갈아놓은 백설기 떡가루 같은 눈이 종종 물불가리지 않고 쏟아 부을 때도 있는 고을이다 보니 조금은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그렇게 창밖을 스치는 소담스런 눈 속으로 빠져들며 조반을 마쳤다.

사륜SUV는 남달랐다. 덩치와 무게에서 내 사륜승용차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달릴 만 했다. 요금소를 지나 고속도로에 들어설 때만 해도 눈길은 잘 치워져 있었다. 나는 호기롭게도 잔잔하게 울려 퍼지던 음악볼륨을 키웠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 했던가.

내가 생각했던 평범한 눈길이 아니었다. 제설작업도 분주히 이뤄지고 있고 많은 차량들이 다녀서 고속도로는 달릴 만 했는데 문제는 안개였다. 바퀴에서 떨어져 나와 사정없이 치대는 좁쌀 같은 눈 쪼가리들이 안개와 뒤섞이니 이건 흡사 하얀 옷을 뒤집어 쓴 하루살이가 쉴 새 없이 덤비는 것 같았다.

훅 치고 들어온다. 하루살이라고? 내 인생도 하루살이여? 하루살이를 헤집는데 설레게 만드는 뜻 모를 출렁임이 인다.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은데 되레 평온하다. 그제저녁부터 읽기 시작한 시산문집 하나가 자꾸만 가슴에 착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있다. 눈길을 터벅터벅 걷듯이 눈안개 낀 고속도로를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자니 생각은 자꾸 엊저녁에도 읽었던 시산문집으로 빨려든다. 도저히 진도를 나갈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이 나를 사로잡고 있는 시산문집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다.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를 쓴 작가 김이듬은 2000년 8월 달빛도 없는 초저녁에 나도 걸었고 물빛을 머금고 사는 하루살이가 춤도 췄던 일산호수공원 가로에 터를 잡아 ‘책방이듬’을 차린 책방지킴이이자 카페 쥔장이며 유명한 시인이고 대학교수다. 근데 내가 보기에 작가 김이듬은 그 무엇과도,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만능 엔터테이너이고 팔방미인이다. 얼굴도 뵌 적 없는 내가 이렇게 자신감을 두는 까닭은 저 시산문집 때문이다.

강렬했다. 코에 들이닥친 책향은 너무도 강렬했다. 책명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어디에도 붉은색 심장을 쿵쾅쿵쾅 다듬이 방망이 두드리듯이 툭탁툭탁 치댈 언어적 공간이 없는데 말이다. 책을 감싸 두르고 있는 분홍색 때문이었을까. 분홍색은 관계이고 로맨틱한 매력덩어리 사랑이라 했는데.

그 강렬했던 책향마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정말 한순간이었다. 지독히도 치열했던 시인의 작가적 삶이 절절히 녹아있다는 것을 안 그 시점에 나는 더 이상 책장을 넘길 수도 책향을 맡을 수도 없었다.

문학동네로 가는 기차의 유일한 객실인 ‘책방이듬’이 발차하는 날을 하루 앞두고 ‘내 남은 생의 첫 날’이라 말하는 시인 김이듬에게 그의 선배는 그에게 우려를 질문으로 포장한다. “제법 많은 책을 냈고 대학 강의도 나가는 중견 작가인데 작품이나 쓰지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하느냐?”라고. “안정을 한 조각의 모험과 맞바꾸고 확실한 것들을 열정과 바꾸리라”라는 대답을 속으로 삭이며, “내 심장이 두근거리며 온몸이 뜨겁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기분을 잃어버리고 살게 될까 봐 두려웠다”라고 시인 김이듬은 스스로에게 고백한다.

책방이듬의 쥔장으로서의 고뇌를 치열한 작가적 삶의 한 단면으로 나는 읽는다. 내 마음 한구석이 겁나게 짠하다. 책을 쓰지 않고 책을 파는 시인 김이듬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의 눈길이 시인에게 꽂힐 때나 앞치마를 두르고 차를 만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객실 책방이듬으로 선뜻 들어오지 않는 심정을 헤아릴 때에도 시인의 사랑법은 줄기차게 한결같다. “세상에 지친 이웃들에게 이곳이 위안의 최전선이기를 바란다.”면서.

목숨을 걸고서라도 하고 싶은 건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나는 이것만은 꼭 해야겠어”라고 외치며 두 손을 번쩍 치켜들 사람들 말이다. 나는 시인 김이듬의 시산문집에서 그 같은 장면을 여럿 목도하고 있다.

특히 공동체를 위해 내어놓는 책방이듬이 그들의 기차역이고 객실이길 바라는 시인의 투쟁적 시간들을 여럿 목도하고 있다. 범부는 꿈도 꿀 수 없는 참으로 대단한 작가적 여정이다. 작가 김이듬이 시산문집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의 곳곳에 그의 이런 심정이 녹아있어 책향을 맡으며 책장을 넘길 때마다 찡한 심장이 손끝을 타고 책장에 내려앉는다.

하루치의 책을 복용하지 않으면 삶의 의욕을 잃는 불치병이 있다는 김이듬 시인은 사람의 심리적 치료방법까지도 터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책읽기에 도가 튼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

머리카락에 작고 마른 나뭇잎을 붙이고 나타난 아쿠아리움 청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친 모습의 청년은 시인 김이듬의 책치유에 빠져 종내는 밝고 평안해진 얼굴로 미소를 남긴 채 책방이듬을 나섰다. 그 사이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인은 참담하면서도 아늑한 물고기가 되어 시를 썼다고 고백했다. 그 중 일부를 옮김으로써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를 내려놓아야겠다.

시인 김이듬이 책방이듬의 객실을 찾는 여행객들보다도 더 행복해지면 좋겠다.

유리벽을 두드리며 나를 깨운다

나는 산호 사이를 헤엄쳐 주다가 모래 비탈면에 누워 사색한다

나는 몸통이 가는 편이고 무리 짓지 않는다

사라진 지느러미가 기억하는 움직임에 따라 쉬기도 한다

누가 가까이와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 곁에서 책을 읽고 오늘처럼 돈이 필요한 날에도

팔지 않는 책이 내게는 있다

궁핍하지만 대담하게

오늘처럼 인생이 싫은 날에도 자라고 있다

, -김이듬, 「아쿠아리움」 중후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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