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범 전 국회의원 보좌관

나이가 들면서 틈날 때마다 정리를 일삼다 보니 내려놓는 게 일상이 되었다. 생각마저 내려놓는 어떤 때는 멍한 시간만이 나를 지배한다. 그런 내게 새해 들어서 표 나게 달라진 게 있다. 삶의 걸음마를 시작한 때로 돌아가기라도 하듯이 운동으로써 ‘매일걷기’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아직은 6일째에 불과하지만 그 맛에 점점 빠져들고 있다. 걷기를 시작한 지 6일째 만에 목표치인 하루 1만2천보에 이르렀다. 이제 매일 1만2천보는 무조건 걸어도 될 만큼 몸이 반응한 게다. 운동으로써 어떤 행위가 습관화에 이르러 몸이 반응하기까지는 약 12주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기왕에 시작한 매일걷기가 지속적으로 반복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동네 앞으로 넓게 펼쳐진 동진벌판을 걸어서 동진강가에 닿기까지 쉼 없이 들판을 걷고 있는데 갖가지 숨소리들이 나를 깨웠다. 동진강에 이르러선 백강전투의 현장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걸음소리에 놀라 눈밭을 딛고 날아오르는 오리들이 나를 놀라게 했다. 미끄러지듯이 물살을 헤엄치며 물속을 넘나들던 따오기들은 잘도 달아났다.

어릴 적엔 동네 형들을 따라다니며 얼음지치기도 하고 연날리기도 하며 어떤 때는 오리들을 잡겠다고 조그만 알약을 채워 넣은 먹잇감을 들판 여기저기에 놓던 기억도 났다. 장끼 한 마리가 빛바랜 풀섶을 헤집고 날아올랐다. 그런 동진벌을 걸으며 나는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벌판을 가로지르는 똘(물길수로)에서 흘러나는 작은 물소리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눈 덮인 길상사가 눈앞에 나타났다. 너른 터를 차지하고 있는 길상사는 예사롭지 않은 절집이다. 수없이 다녔지만 갈 때마다 느끼는 감흥은 언제나 달랐다. 무소유를 실천했다는 법정스님의 절집이었다. 그가 홀연히 모두를 놓고 떠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법정스님의 책들과 어울린 적이 있었던 나는 지금 무소유를 실천하고 있는가. 가진 것이 그리 많지 않으니 무소유를 실천한 것인가. 지식도 무소유로 인식될 수 있을까. 각기 가진 지식을 어떤 형태로든 무소유로 나눌 수 있을까. 재능기부는 지식의 무소유일까. 한세상을 치열하게 사시다 먼저 가신 한 분이 떠올랐다.

변호사 조영래는 지식의 무소유를 실천하다 이른 삶을 마감했다고 알려져 있다. 법지식의 실천가이자 무소유자 조영래는 자신을 불살라 근로기준법의 준수를 외친 전태일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다. 어떤 이는 전태일이 있어 조영래가 있었고 조영래가 있어 전태일이 빛이 났다고들 한다.

조영래의 무소유는 그가 가진 지식체계로써 모든 소유의 방편들을 취할 수도 있었는데 이를 거부한 것이어서 더욱 빛났다. 조영래처럼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찾아내려와 밑바닥 노동자의 고통을 몸으로 익히며 세상 사람들에게 그 참상을 대변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법정과 조영래 말고 역사적 관점에서 무소유자가 있었을까. 부처님이나 예수님은 인류를 대신하여 무소유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참사랑을 실천한 성직자들을 제외하고도 역사적 관점에서 무소유의 삶을 살다간 사람은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참 기이한 곳까지 생각이 넓혀졌다. 이게 걷기의 또 다른 행복일 것이다.

알렉산더가 가린 햇볕을 쐬게 해달라며 비켜서달라고 했다는 디오게네스는 어떨까.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한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와 디오게네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오직 지혜만을 추구했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햇볕을 쐬게 비켜서달라고만 했다니 그 담대함이란 틀림없이 그의 무소유에서 나왔을 것이다.

역시 사유의 대가들인 철학자들이 실천한 무소유의 삶은 도드라졌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도 그런 실천가였다. 오스트리아의 최대 부호집안에서 태어난 비트겐슈타인은 그 엄청난 유산을 포기했는데 그 이유가 참으로 기가 막힌다.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지는 것은 철학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라니 이를 믿을 수 있겠는가.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교사 수준의 월급정도로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다고 한다.

앞서 언급했던 변호사 조영래의 무소유는 작금의 지식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크다고 하겠다. 무소유의 대상은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축적되어지는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지식도 똑같은 무소유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지식을 무기로 삼아 오직 자신의 이기적인 출세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지식을 사용하는 이타적인 무소유 지식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식인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요즈음이다.

무소유한 지식인의 삶을 생각했던 나의 걷기는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철학자 디오게네스로부터 법정스님과 1990년 12월 12일에 세상을 떴던 변호사 조영래의 삶을 반추하면서 나의 앞으로의 소명을 생각했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암울한 뉴스가 가득한 저녁 시간이다. 그 중에서도 30년 후면 지방소멸이 엄습하게 될 것이란 한국고용정보원의 연구결과는 지방살이에서 피부로 느끼고 있는 바인데 잘도 짚어냈다.

하체는 부실덩이인 가분수가 되어가는 수도권 집중을 해결하지 않고는 한국의 미래가 암담하리란 예측이 나온 건 벌써 오래 전 일이다. 그런데도 수도권 집중화는 이미 인구대비별 대한민국의 절반을 넘어섰다. 수도권이든 지방이든 정치권이나 정책입안자들을 살펴보건대 머잖아 절벽으로 떨어지고야 말 폭주기관차를 멈추려는 생각들이 없는 것 같아서 한탄스럽다. 이타가 아닌 이기에 빠져서 헤날 줄을 모른다. 어디 물질과 지식에서만 무소유가 필요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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