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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포만(곰소만) 어업에 대하여(2) 壺岩主人 그리고 ''海王 朴敬三'

부안군 줄포만(곰소만) 1900년대 어업을 연구한 김일기 교수의 논문 '곰소灣의 漁業과 漁村硏究, 1988년, 서울대지리학과'은 부안 역사를 전담한 중요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당시 칠산어장 줄포 객주에 대한 기록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韓國水産誌」(1908年)에 기록된 줄포의 수산물 객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수산물 거래는 객주의 손에 의해 행하여 진다. 객주는 5戶가 있는데, 그 수에는 제한이 있어서 임의로 개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새로이 개업하고자 하는 자는 그를 양도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가격은 객주의 거래처 여하에 따라서 상이하다.

智島郡 諸島와 거래하는 객주를 群山主人, 洪州郡 각지와 거래하는 객주를 元山主人, 扶安郡 각지와 거래하는 객주를 壺岩主人, 庇仁郡 각지와 거래하는 객주를 庇仁主人, 咸悅郡 각지와 거래하는 객주를 熊湖主人이리 칭하고 就中 群山主人이 가장 高價하여 1萬圓의 價額을 갖는다”고 하였다. 이 같은 기록으로 볼 때 당시 이곳 객주의 영향권이 충남 홍성군 연안에서 위도와 곰소만 일대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안군 각지를 거래하는 객주는 壺岩主人이다.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감교마을에 천도교호암수도원이 있는데 이곳 지명이 예로부터 호암壺岩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김종근 이장 증언)

줄포만을 끼고 있는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호암 마을도 있으며 십승지로 알려져 있으나 지명이 호암壺巖이다. 일부 기록에서 부안군 산내면 호암 역시 십승지로 분류하고 있다.

智島郡을 관할하였던 群山主人의 株가였던 高價였던 것은 당시 조기잡이 主漁場이었던 蝟島가 지도군에 속하였기 때문이다(그림 42)

이들 수산물 객주 세력은 어업조합이 발족하기 이전까지 이곳 수산물 거래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줄포에 수산물 객주가 많았던 것은 이곳이 浦口로서 일찍부터 많은 선박이 출입하여 어획물 판매와 자금조달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또한 어획물은 대부분이 鮮魚商品으로 매매되기 때문에 유통과정에서 滯留하는 시간이 짧아야 상품성이 유지된다. 따라서 시기와 장소의 선택이 魚價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곰소만에서는 줄포와 법성포가 지리적으로 가장 적합한 浦口였다.

어민들이 상업자본가인 객주에 크게 의존한 것은 당시의 어업이 아직도 近代的인 생산양식에 지배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어민들이 수산물의 판매시기와 장소 선택 등 시장 사정에 어두웠었고 유통 과정에 많은 정력을 소비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0~30년대 곰소만 일대 수산물 유통을 장악하고 있던 茁浦客主는 朴敬三을 비롯하여 金吉順, 辛世源, 安仁善, 申相彦 등이었다. 

朴敬三은 수많은 살주를 두고 위도를 비롯한 곰소만 연안 어민들을 상대로 어선을 담보로 하여 어로자금을 비롯하여 생계비까지 前貸해 주었다. 그가 어민들과 魚物去來하면서 담보로 잡은 어선이 60여 척이 넘었다. 그는 이곳에서 '海王'으로 불릴 정도로 이곳 어민들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박경삼은 법성포에 지점을 두고 객주활동을 했다.

당시 박경삼 객주가에는 500여평 대지에 6채의 가옥이 있었다. 현재는 가옥 대부분이 파손되거나 개축되어 그 당시 건물구조를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고 한다.

(살주: 客主밑에서 어물구입 및 판매를 관장하며 한 어선에 승선하여 어획물의 수량 및 가격을 계산하고 돈을 지불하는 書記)

출처:곰소灣의 漁業과 漁村硏究, 김일기, 1988년, 서울대지리학과

 

출처:곰소灣의 漁業과 漁村硏究, 김일기, 1988년, 서울대지리학과
출처:곰소灣의 漁業과 漁村硏究, 김일기, 1988년, 서울대지리학과
 

조봉오 기자  ibuan11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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