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범 전 국회의원 보좌관

삶 또는 인생이란 말 자체를 가끔씩 생각한다. 특히 선택의 변곡점에 이르러서는 그 농도가 짙어진다. 때론 그 의미가 수십 가지로 번져나가기도 한다. 지금이 또한 그런 선택의 중차대한 지점인지라 회상의 시간들도 잦을 수밖에 없다.

오늘따라 삶의 의미가 버겁다. 삶의 의미를 살피고 실천할 때 버겁지 않은 경우가 있었을까마는 오늘은 유독 더한다. 주어진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가 아닌 “어떤 의미로 살아내야 하는 삶이 내게 주어진 걸까.”는 수도 없이 반복해서 살핀 내 삶의 일환이다. 이는 여전히 떠나보낼 수 없는 내 삶의 동력이기도 하다. 이 같은 동력을 얼마나 잘 활용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들추어낼 수 있을 만큼의 인생여정은 남아있는 것 같다.

내 삶의 동력인 “살아내야 하는 삶의 의미”를 찾는 중에 으뜸인 나의 벗은 책인데, 종종 나의 뿌리였던 농토와 산하인 경우도 많다. 특히 이런 시간을 책들인 벗과 함께 나누다보면 그 의미가 한결 증폭된다. 책속에 길이 있다는 말을 상기하지 않아도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는 이미 삶의 의미로 가득 차있다. 하물며 책도 이럴진대 농토를 딛고 찾아가는 의미와 재미는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겠는가.

지방이 안고 있는 여러 사안들을 살피는 첫걸음은 대부분 책을 통해서이지만 종국에는 농토와 결부시킬 수밖에 없다. 침체의 늪에 빠져 활로를 찾지 못하는 지방의 문제점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부안의 여러 사안도 이 같은 문제점을 피해가지는 못한다. 침체로 가는 길이냐, 활로를 찾는 길이냐의 두 갈래만 있을 뿐인 게 참으로 안타깝다.

부안이 농업중심사회여서 그럴까? 농업중심의 틀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식도, 활로를 찾는 길도 농업과 농토를 제쳐두고서는 여간 쉽지 않다. 농업사회로부터 변천을 거듭하여 현재의 지식산업사회로의 대전환기에 살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수많은 지식산업정책들이 농업기반사회인 부안에도 뿌리를 내린지가 십 수 년이 돼간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고래로 농업사회를 지탱했던 ‘두레’와 ‘품앗이’를 생각하곤 한다. 협업 내지는 협동이 절실한 우리사회를 반추할 요인으로 적격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힘만이 아니라 정신적 힘이 필요한 때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벼농사일이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대체재로서의 지식산업사회를 추구하는데 나름의 경종을 울리는 의미로서 벼농사를 드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때마침 나의 이런 사고력을 긍정적이도록 만드는 책이 출간되었음을 알았고 단숨에 읽어 나갔다. 서강대학교 사회학과 이철승 교수가 최근에 펴낸 <쌀 재난 국가>가 바로 그 책이다. "한국의 유례없는 성공도, 세대불평등도 벼농사체제에서 기인한다"라고 주장하는 이 교수는 ‘두레’와 ‘품앗이’의 협동력을 사회발전의 근간으로까지 인식한다.

잘 아는 바와 같이 두레와 품앗이는 고래로 이어진 협동농업의 대표적인 우리의 문화유산이자 노동유산이다. 우리나라의 발전단계에서 사람들을 견인하는 동력인 협동(協同)을 만들어내는 제도적 장치(두레나 품앗이 같은)가 내부에 있었고, 노동의 표준화와 숙련을 증진시키는 내부 통제기제역할도 수행했다고 본 것이다.

기업현장의 작업장 시스템을 갖추면서, 이 전통적인 도덕 내지는 제도, 법적·정치적 제도가 아니라 몸에 배어 있는 인간관계상의 제도를 어떻게 이용했느냐의 문제로 산업발전의 구조적 문제를 살피고 있는 것이 특이하면서도 공감을 일으킨다. 반도체도 그렇지만, 동아시아가 특화하는 산업은 협업의 기회를 극단화시킨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불량률을 최소화하는 극도의 긴밀한 협업의 과정, 그게 바로 벼농사체제에서 유래한다는 것으로 본질은 두레와 품앗이의 협동력이라 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우리의 발전구조를 분석한 그는 역사학 쪽에서는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프랑스의 역사학자로서 인류학, 경제학, 지리학 등의 연구 성과를 아우르며 20세기의 역사연구에 혁명을 일으켰다고 평가받는다.)을 수용하면서 이를 비판하고, 인류학에서는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 Strauss, 벨기에 태생인 프랑스의 인류학자, 민족학자로 구조주의 인류학의 창시자)를 들쑤시면서 동시에 그 구조를 뛰어넘어보자는 논의를 펼치기도 하는데, 그 기저에 두레와 품앗이가 있다.

두레와 품앗이! <쌀 재난 국가>에서 드러난 이 같은 주제들로 부안문제를 해소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문제해결의 방향성을 찾는 것으로는 충분했다. 지역사회의 역할로 기왕에 생각해온 두레와 품앗이가 내게도 중심의제였으니 말이다. 부안의 활로를 찾아야 하는 것은 우리들 모두의 지상과제일 것이다. 그런 의미로 이번 졸독에서 느끼는 감흥은 남다르다. 특히 그 졸독이 부안의 농토와 삶과 연관된 내 방식이어서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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